평면과 입체작품, 오브제작업, 판화, 도자, 자수, 사진, 비디오, 설치, 대지미술, 퍼포먼스, 메일아트, 무용, 영화, 무대미술과 의상 등 예술장르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모더니스트 작가 김구림(77) 그가 '끝없는 여정'이란 타이틀로 4월 3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통인옥션갤러리와 통인화랑에 1970년대 '정물시리즈'와 2000년 이후 '음양시리즈'를 통해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방대한 작업량과 작가적 삶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고, 특정한 스타일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다. 기존 미술의 진부한 관념과 획일적 사고를 이탈해 늘 새로운 감수성과 미술에 대한 고정되지 않은 사유를 선보인다. 김 작가가 전시를 앞두고 서울 평창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전시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하는 작업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들이 새로운 것을 하는 줄 아는데, 전부 내가 예전에 했던 작업들이야! 당시는 몰라주었는데, 지금은 각광을 받더라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아티스트로서 걸어온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는 세태에 대해 여운이 담겨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김구림은 늘 화제를 모으는 작가로서 이목은 끌었지만, 미술관에서는 찾지 않는 아웃사이더였다. "제 작품에서 흔히 보는 것들은 미리 생산된 상품들을 시장에서 구입한 것들입니다. 새 것을 캔버스에 붙이고 마치 골동품처럼 보이게 만들었죠. 최근의 것이 마치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것을 알게 된 순간 눈썰미 있는 사람들이 많이들 놀래요."
미술이란 장르에 시간이라는 이야기를 시도한 세계 최초의 작가로서의 자부심이 담긴 육성이다. 김 화백은 "동양화가들이 화선지를 바닥에 놓고 그림을 그리듯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작업한다. 컴퓨터에서 디지털 프린트로 뽑아낸 캔버스면의 어떤 사물과는 상관없이 큰 붓질로 그 형상을 지워 나가는 행위를 함으로서 화면에 새롭게 탄생된 형태는 원초적인 에너지를 관람자에게 전달한다"고 했다. 이어 "캔버스를 세워놓으므로 마르지 않은 물감이 흘러내리는 자연의 형태에 순응하는 것이며 그것은 신비한 화면으로 둔갑되어진다. 기교가 없는 붓질은 가장 순수한 기교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시간의 흐름 통해 디지털과 아날로그 공존을 이루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구림의 작업에 대해 시기별로 나누어 그 흐름에 따른 변화를 살펴 볼 수 있다. 통인화랑에서는 1970년대의 일상의 사물을 주제로 한 작업들을 선보인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어딘지 모르게 매혹적이고 이질적이면서도 무척 세련된 논리성과 감각적인 선 그리고 일상적 사물의 윤곽만을 드러내거나 몇 개의 선으로 표시된 주변의 상황 설정, 그리고 같은 사물을 몇 개고 겹치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시간의 중첩을 노리는 한편 사물의 이름, 위치, 크기, 거리 따위를 목탄으로 쓰거나 긋거나 지시, 표시한다. 그 후 그 흔적을 다시 지워 겨우 행위의 흔적만을 남겨둠으로써 일상적인 사물이 지니는 현존성을 확인한다. 통인옥션갤러리에서 펼쳐지는 김 화백의 2000년대 이후의 작업은 소비사회에 잠식된 현대문명을 주제로 대표작인 음양시리즈를 조명한다. 음양시리즈는 음과 양으로 설명되는 양극 혹은 전혀 관계없는 두 이미지를 디지털이미지와 아날로그적인 붓질이 한 화면속에 공존하고 있다. 절박한 붓놀림으로 한 작가만의 자존적인 존엄성이 깃들어 있으며 그것은 곧 생명력으로 귀결된다. 한편, 오는 7월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김 화백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초대전이 열린다. 이곳에서도 60년대와 70년대 작업들이 중점적으로 소개될 예정이다. 당시 김 화백의 작품들은 시대적인 외압의 영향으로 강제 철거를 당한 작품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저항의식을 당시 정권에서 불편했던 것이다. 김 화백은 과거 선보였던 '얼음'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에 선보일 것이라는 귀띔도 해주었다. 이 작품은 커다란 빨간 보자기에 얼음 덩어리를 쌓고 보자기를 묶어 놓는 일종의 설치 작품이다. 온도에 의해 녹아내리면서 보자기가 땀을 흘리는 형태를 보여주려는데, 미술관측이 앞마당에 설치하자고 해서 고민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3년여의 준비기간을 통해 마련된 김구림 화백의 '끝없는 여정'전은 그가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려 했는지 고민이 묻어난다. 다른 경향, 장르의 작업들을 아우르는 중심사상과 일관된 특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찾아보고, 그 의의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는 의미있는 자리로 다가온다. - 왕진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