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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큐레이터 다이어리 - 21]영원한 화랑인 김창실 2주기 맞아

자신을 낮추고 소통하는 미술계 리더, 그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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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32호 박현준⁄ 2013.06.27 11:55:12

6월 중순, 무더위가 시작되는 이맘때쯤 세상을 떠난 김창실 대표가 생각난다. 그 분이 세상과 작별한지도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도 고인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작가와 선화랑을 찾는 많은 분이 그녀와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고 김창실 대표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한다. 1977년부터 2011년까지 35년간 인사동 선화랑을 변함없이 지켰던 김창실 대표는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예술과 문화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김 대표의 아버지는 견문이 넓고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높은 학력을 갖춘 지식인으로 황해도 황주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며 문화사업을 펼쳤다. 어렸을 적에 김 대표는 아버지를 따라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이 문화를 많은 사람과 나누며 살아온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김 대표가 처음 화랑경영을 하고자 했을 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많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화랑 경영자로 인도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과 문화를 나누고자 한 경험 말이다. 60년대 초, 김 대표는 도상봉 작가의 라일락을 구매하면서부터 그녀의 운명은 바뀌게 되었다고 생전에 자주 회상했다.

약국을 운영하면서 집에 빈 벽면 곳곳에 그림을 사 모아 걸어두었고, 마침 1977년 서울 인사동 건물에 세입자가 나간 뒤 주위 사람들에게 화랑 경영을 권유받아 선화랑을 설립한다. “1977년. 뜻밖에 우리 집에 변화가 왔다. 서울 인사동 현재의 선화랑 건물에 세들어 있던 화랑이 나가니 나보고 직접 화랑을 경영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처음엔 몹시 당황했으나 대학에 갓 입학한 큰아들의 말에 용기를 내서 경영에 나섰다”고 김 대표가 화랑을 처음 시작하게 된 경위를 어느 신문사에 직접 기고한 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선화랑의 선(選)은 ‘먼저’라는 의미보다 ‘가려내다’라는 의미이다. 정도(正道) 경영을 원칙으로 삼았던 김 대표는 신뢰와 실천이라는 올바른 태도로 화랑운영을 일관했다. 또한 10여 년을 넘게 미술품을 수집해왔던 경험과 안목에도 미술에 대한 전문가를 영입하고 지속적인 전문적 화랑으로 키워나갔다. 당시 홍익대 박물관장 이경성 관장은 당시 선화랑 개관 기념전을 지도하였고, 평론가 유준상, 유홍준, 서성록 선생을 주간으로 한 계간 선미술지를 펴냈다. 요즈음은 자신을 낮추고 소통하는 리더가 큰 뜻을 이루는 경영자로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있다. 필자가 그 분을 큰 그릇이라고 자주 생각이 드는 이유는 각계각층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을 담고자 한 화랑운영 방침을 뜻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많은 사람이 선화랑에 찾아왔지만 마다했던 일이 없었다. 김창실 대표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결정지어야 할 많은 문제 또한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신중하게 결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김창실 대표는 선미술지 계간사업과 선미술상을 제정을 통해 미술인구 저변확대와 젊은 예술가를 지원 육성하고자 하는 뜻을 펼쳤다. 화랑협회장 두 차례 역임, 미술발전 산파역 선미술지는 79년 봄호 특집작가 김형근 선생을 시작으로 13년간 발행됐다. 매번 적자가 발생하는 사업이었지만 그분은 이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이것은 당시 평론가와 미술사를 연구하는 석·박사들의 연구들을 싣는 기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작가들과 미술애호가들에게 정보교류의 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선미술상은 35세에서 45세의 젊은 작가들에게 상금과 전시공간을 지원하는 상으로 수상자는 고 손수광, 오용길, 고정수, 고 황창배, 고 이두식, 김영원, 이석주, 김병종, 황인기, 황주리, 문봉선, 서도호, 김범, 박은선, 이이남 등이며 이들은 중 다수의 작가는 한국미술계를 이끄는 작가로 성장해 국내·외에서 활동 중이다. 또한, 한국화랑협회 회장에 두 차례(85~87년, 90~93년) 재임했으며, 이 기간 중 지도적 역할을 잘 수행해 냈다. 첫 번째 회장 재임 중인 86년부터 화랑협회 주관으로 ‘화랑 미술제’를 처음 제정 및 개최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장시켜 미술 대중화의 기틀을 다졌다. 작고 전까지도 화랑협회의 원로로서 고문 역할을 맡으면서 미술계가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미술계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합리적이고 비중 있는 역할을 도맡았다. 재임 기간 중 일에 관해 김 대표는 “세계 IMF 총회가 서울서 열렸을 때 회의장에 회원 화랑들의 작품을 걸어 재무부 장관의 표창을 받던 일.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 연 화랑미술제에는 역사상 유례없는 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며 자평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미술문화발전에 대한 공적을 인정을 받은 김 대표는 2009년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하는 영예를 안았다. 필자가 본 김창실 대표는 대한민국 미술발전에 헌신한 인물이다. 화랑계의 대모라 불리며 활달하고 이해심 많은 그분은 여전히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앞으로도 미술을 사랑하는 고인의 정신과 뜻을 잘 받들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그 이념을 후세에 전달하는 큰 역할과 책임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김재훈 선화랑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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