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으리, 침착하옵소서.” 진성대군의 부인 신씨는 공포에 떠는 남편을 위로했다. 1506년 9월 1일 깊은 밤. 적막을 깨는 말발굽 소리와 창칼을 든 무사 수십 명이 진성대군 사저를 순식간에 포위했다. 진성대군 사저는 순간,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다. 진성대군은 이복형인 연산군에 대해 극도의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 얼마 전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을 모셨던 후궁 숙의 정씨와 엄씨 그리고 이복동생들을 죽였다.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이었다. 진성대군은 폐비 윤씨의 뒤를 이은 정현왕후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다른 그도 생명이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숨을 죽이고 살아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무사들이 집을 포위한 것이다.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 진성대군은 자살을 생각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불안에 떠는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반정하던 날, 먼저 군사를 보내 임금(중종)이 살던 궁을 에워쌌다. 이것은 혹 중종을 해칠 자가 있을까 염려해 호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임금은 놀라 자결하려고 했다. 그러자 부인 신씨가 “군사의 말 머리가 이궁으로 향하고 있으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말 꼬리가 궁으로 향하고,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섰다면 분명히 공자를 호위하려는 뜻일 것입니다. 알고 난 후 죽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부인 신씨는 소매를 부여잡고 굳이 말리면서 사람을 내보내 살펴보게 했다. 과연 말 머리는 밖을 향하고 있었다. 이때 집 밖에서는 종친인 운산군 이계와 덕진군 이예, 지평 윤형로가 큰 소리로 뵙기를 청했다. 한밤중에 종친들이 자신을 체포하러 왔을 까닭은 없을 테고 이상한 일이었다. 두려움에 우왕좌왕하는 진성대군과는 달리 부인 신씨는 사태를 냉정하게 판단했다. 부인 신씨는 진성대군에게 “말의 머리가 집으로 향했으면 탈출을 하시고, 말의 머리가 대궐 쪽을 보고 있으면 저들을 안으로 들이소서”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중드는 아이에게 군사들이 타고 온 말의 궁둥이가 향한 쪽이 어디인지 물었다. 아이는 말의 궁둥이는 집으로, 머리는 밖으로 향했다고 답했다. 부인 신씨는 남편을 설득한다. “나으리,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저들을 만나세요. 좋지 않은 일이라면 말 머리가 집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 머리가 대궐로 향하는 것은 정중하게 모셔가려는 것입니다.” 이어 진성대군의 명령으로 대문이 열리고 운산군 이계와 덕진군 이예, 지평 윤형로가 무릎을 꿇는다. 운산군은 세종의 손자로 왕실의 원로였고, 덕진군은 세조의 손자였다. 다시 말해 운산군은 진성대군에게 할아버지였고, 덕진군은 아저씨였다. 또 윤형로는 사촌 외삼촌이었다. 윤형로가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옹립하기 위해 지사들과 뜻을 모으고, 무사들이 칼을 뽑아 거사하였음을 아뢰었다. 새파랗게 질린 진성대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두려움에 떠는 진성대군에게 운산군이 나섰다. “대군께서 지체하시면 종묘와 사직은 무너집니다. 이대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어서 수레에 오르세요.” 운산군이 재촉하자 진성대군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사정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합니까.” 운산군은 불안에 떠는 진성대군에게 말했다. “신은 사사로이는 임금(연산군)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태조대왕께서 이룬 종묘와 사직이 무너지는 것을 그냥 볼 수 없어 목숨을 걸었습니다. 오늘의 의로운 행위를 선왕(성종대왕)께서 굽어 살피실 것입니다.” 마침내 진성대군은 의관을 정제하고 나섰다. 운산군과 덕진군, 윤형로, 구수영 등이 수레를 호위하고 경복궁에 입성했다. 이날 연산군을 몰아낸 진성대군이 중종이다. 신씨 부인은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 신수근은 거사 당일 이미 불귀의 객이 되어 있었다. 반정 지휘자인 박원종이 거사 동참을 권유했다가 거절당하자 기밀유지를 위해 제거했던 것이다. 정변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신수근은 역적으로 몰렸다. 반정군들에게 왕후 신씨는 역적의 딸이었다.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반정군은 힘없는 중종을 압박했다.
연산군 몰아낸 진성대군이 중종 중종 실록 1년 9월 9일에는 그 상황이 기록돼 있다. “지금 신수근의 친딸이 궁중에 있습니다. 만약 중전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집니다. 인심이 흩어지면 종사에 위해가 되니 은정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 중종은 ‘조강지처는 버리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맞섰으나 무엇 하나 결정할 힘이 없었다. 유자광,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대소신료들이 떼 지어 신씨의 폐출을 주장하고 일어서자 결국 백기를 든다. 왕궁 입성 일주일 만에 부인 신씨는 경복궁 건춘문을 나섰다. 9월 2일 입궁해 9월 9일 폐비가 된 것이다. 불과 일주일, 이레 동안의 짧은 사랑이었다. 열세 살에 대군에게 시집가, 열아홉에 왕의 아내가 된 신씨는 이레 만에 사가로 쫓겨났다. 중종은 아내를 잊지 못했다. 궁궐에서 왕후의 본가 쪽을 바라보곤 했다. 이에 신씨는 집의 뒷동산 바위에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놓았다. 만날 수 없는 임금과 왕후는 치마바위를 통해 사랑을 확인했다. 중종은 세상을 뜨기 전인 1544년 11월 15일 신씨를 궁궐로 불러 폐출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얼굴을 보았다. 실록에는 만남을 소문이라고 적고 있다. 한 많은 삶을 살다가 명종 12년(1557)에 일흔한 살로 세상을 등진 신씨는 친정 조카가 제사를 지내왔다. 그녀는 사후 182년 만인 영조 15년(1739년)에 단경왕후로 복위되어 중종과 함께 종묘에 신주가 모셔졌다. 야사는 그때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임금이 친히 사당에 가 뵙고 도승지를 시켜 고유제를 지냈다. 또 경덕궁으로 옮겨 모시어 신주를 고쳐 써 임시로 숭정전에 봉안하였다. 5월 1일 경덕궁에 거동하여 개조한 신주를 임시로 자정전에 봉안하고 묵은 신주를 능소에 묻었다. 5일에 태묘에 부할 때 제1실부터 제6실까지는 감실을 열고, 7실 아래는 감실도 열지 않고 문도 열지 않았다. 1실은 태조, 2실은 태종, 3실은 세종, 4실은 세조, 5실은 성종, 6실은 중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단경왕후를 종묘에 모실 때는 순위가 위인 왕과 왕비에게는 뵙는 신고를 하기 위해 감실을 다 연다. 그러나 단경왕후보다 아래인 임금과 왕비의 신주에게는 신고할 필요가 없기에 다른 감실은 일부러 열지 않게 한 것이다.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