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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아티스트]노상준, 저항적·치유적인 ‘작은 문명’

진정한 조각은 브론즈가 아니라 날짜 넘긴 포장박스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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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36호 박현준⁄ 2013.07.22 18:08:47

현세계가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라는 자각이 머리를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많은 화가와 시인들의 질문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상준의 질문이기도 하다. 그에게 이 문명은 과잉이고 거품이다.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급류고 과도하게 역동적이며 오르기를 포기할 만큼 높이를 지향한다. 그가 살아왔던 도시들은 예외 없이 고도의 행동주의를 부추긴다. 경쟁에서 뒤쳐지는 것이 용납되어서는 안 되고, 경력, 건강, 사람들을 포함하는 많은 것들을 자신의 관리목록 안에 잘 정착시켜야 하며, 언제나 성실해야하고,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아야 하며, 모든 성취는 가시적인 결과로 입증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해져야 하는 것인가. 동기는 열을 올릴수록 더욱 불투명해지고, 물론 어떤 최소한의 결과도 담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치 어떤 힘에 이끌리기라도 하는 듯, 같은 행동들을 반복하고 지속적으로 추구한다. 동일한 트랙, 동일한 목표에 집착하면서, 그리고 공허한 비교와 경쟁에 스스로를 함몰시키면서, 교육과 규범과 제도를 동원해 그러한 사고와 행동을 서로에게, 부모가 아이들에게, 교사가 학생들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설득하고 주입하고 강요하면서 그렇게 한다.

이러한 과정을 겪어 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거의 넋이 나간 상태가 된다. 순간순간 스스로를 사유로부터 소외시키고, 의식과 고립시키는데 중독된다. ‘기본적으로 빠르지 않은 리듬감을 가지고 사는’ 부류의 사람들-그들 중 한 사람이 노상준-은 이 점점 더 강요되는 중독의 과정에서 직관적인 불편함을 느끼고 일탈을 꿈꾼다. 나는 이 일탈의 꿈이 노상준이 새로이 재건한 문명 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거라 생각한다. 노상준은 자신과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벽을 느낀다. 세상은 그로선 가담하고 싶지 않은 속도에 의해 유지된다. 그 속도는 그가 가진 것들, 해낼 수 있는 것들, 일테면 시 쓰기, 상상하거나 꿈꾸기, 느린 산책, 새들의 지저귐에 귀 기울이기 같은 것으로는 감당할 수도, 도달할 수 없는 목표다. 결국 노상준은 훨씬 덜 고립을 생산하고, 덜 소외를 심화시키는 덜 위험한 세계를 만듦으로써, 자신이 속한 빠르고 폭력적인 세계에 저항하는 쪽을 선택했다. 노상준의 문명이 낳은 세계들은 작고 허름하며 값싸다. 우선 이 문명을 이루는 질료는 고작 포장 박스로부터 추출된 폐골판지와 약간의 채색안료일 뿐이다.

포장박스는 고향으로부터 고립된 이방인이었던 영국시절, 그가 대면했던 차가운 세계에 대한 기억이요 그리웠던 고향의 살점 같은 것이었다. 일테면 고향으로부터 온 것들을 감쌌던 피부 같은 것이랄까. 물론 그것이 통상적 의미의 예술을 위한 재료로서 적절한 선택일리 없다. 그것은 세련미는 고사하고 상당히 천민적이며 견고하지도 못하다. ‘인생보다긴 예술’을 위해 특별히 할당되거나 생산된 고가(高價)의 전문재료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리고도 이 가난한 재질로 된 세계를 격상시키기 위해 취해진 조치라곤 약간의 안료로 그것들의 표면에 회화적 사실성을 부여하는 것이 다이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태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자. 이젠 다이아몬드까지 그 재료로 삼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른 이 축이 뒤틀린 시대에 정면으로 엇나가려는 반동적 입장이 그것이다. 이 태도는 제국을 치유하기 위해 더 큰 제국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그리고 삶의 문제를 다루는데 조차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것들이 필요하다고 믿는 이 시대의 착각과 궤변을 정확하게간파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술조차 값비싼 것들이 삶에도 더 유효하다는 감언이설의 소도구가 (거의)되어버린 시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동반하는 태도인 것이다. 노상준의 태도는 그의 선언들이 아니라 작품 자체의 유전형질에 의해 분명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또는 가난한 미술Poor Art의 이웃사촌쯤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아르테 포베라의 포베라가 예술 담론으로 재귀하는 반면, 여기서의 포베라는 대안적인 삶과 문명으로 튕겨져 나가기 때문이다. 보라. 노상준의 예술은 질료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삶의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온 것들로 구성된다.

위대한 예술은 소유욕과 복수심을 부추길 뿐 그 안에 아픈 경험을 끌어안고 있는 이 세계는 가족의 손길이 배어있는 보잘것없지만 따듯한, 값나가진 않지만 가치있는 것으로만 건설된다. 그의 세계에 예술담론의 울타리를 넘어 치유적 차원이 가미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울이나 런던 같은 대도시는 결국 사람들을 자신들의 쪽방으로 몰아갈 뿐이다. 대기업과 그 산물들은 사람들을 왜소한 소비자로 만든다. 큰 것들, 기념비적인 가치들, 부풀려진 욕망은 결국 주체를 소외와 고립무원으로 몰아가고 만다. 제국, 세계적인 명성, 위대한 예술은 소유욕과 복수심을 부추길 뿐이다. 대안은 작은 것들에 있다. 큰 것들이 고립을 낳았던 만큼, 작은 것들은 대화와 관계를 복원시킬 수 있다. 고독과 고통이 질주 속에서 양산됐다면,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진정한 의미의 조각은 대리석이나 고풍스러운 브론즈로부터가 아니라 날짜분계선을 넘어온 포장박스로부터 가능하다는 사실, 그것이 노상준이 새롭게 붙잡았던 예술론이자 미학이며,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가는 관문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작고 저렴하며 위협적이지 않은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망각했던 안도감을 회복할 것이다. 이를 단지 시점이나 시선의 문제로만 함축하지는 말자. 이는 소통, 곧 경험의 공유인 동시에, 세계 자체에 대한 직관적인식의 문제다. 이 세계가 언제나 낯익고 친숙한 것은 아니지만, 그 낯섬 조차 소외나 두려움이 아니라 안전한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노상준의 불붙은 벌판에선 누구도 화상(火傷)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맹수들은 사나운 척할수록 더 앙증맞다. 곧 발사될 듯 수직발사대에 장착된 로케트는 별을 반사해내는 호수조차 교란시킬 수 없는 쓰잘 것이라곤 없는 물건에 불과하다. 기념비성, 항구성, 명품은 이 세계와 가장 거리가 먼 가치들이다. 포장박스, 감미로운 밤, 놀이동산, 플름라이드(Flum Ride), 불꽃놀이, 발사되지 않는 로켓트로 구성된 이 세계는 하나의 문명, 곧 작기 때문에 위기들이 충분히 관리되고, 언제나 안전이 확보되며, 학습이나 강요 없이 세계를 조망하는 것을 겸허하게 허용하는 새로운 유형의 문명에 대한 제안이다. - 심상용 미술사학 박사, 미술비평(정리: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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