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1호 박현준⁄ 2013.11.04 15:01:42
“나는 소년시절에 기운이 웅장하고 마음이 씩씩했다. 가야금을 타고, 활을 쏘고, 투호 같은 놀이를 하며 살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만약 유흥에 빠져 절제하지 않았으면 정치를 하고 오랑캐를 굴복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세조는 신하들과 가끔 활쏘기를 한 뒤 술을 마셨다. 세조의 화살은 백발백중 과녁을 관통했다. 신하들이 감탄하며 찬미의 시(詩)를 올리기도 했다. 세조는 옛 신하들과 술을 기울이며 소회를 밝힌 것이다. 수양대군이던 소년시절에는 삶을 그저 즐기려는 생각도 했지만 마음을 바꿔 정치를 하고 북방의 여진족을 다스려 나라를 안정시켰다고 술회했다. 세조는 조선을 안정시킨 군주다. 조카인 단종을 쫓아내고 왕이 된 탓에 도덕적인 약점을 지녔지만 정치 풍토를 혁신하고 경제와 사회의 안정을 가져온 군주다. 문종과 단종을 거치면서 비대해진 신권을 억누르고 국왕중심의 나라를 세웠다. 왕은 문과 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다섯 살 때 이미 효경을 읽을 정도의 영재인 수양대군은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에도 크게 뛰어났다. 그의 담력과 세종의 반응이 동각잡기에 실려 있다. ‘세종이 규표(圭表)’를 바로 잡을 때다. 세조와 안평대군 및 다른 유신에게 명하여 삼각산 보현봉에 올라 해 지는 곳을 관측하게 했다. 돌길이 위험하고 또 예측할 수 없는 벼랑이 내려다 보였다. 안평대군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이 아찔하고 다리가 떨려서 전진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조만은 나는 듯이 걸어가서 순식간에 올라가고 내려갔다. 보는 사람들 모두 탄복하여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늘 넓은 소매 옷을 입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세종이 이르기를 “너처럼 용력 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처럼 넓고 커야만 될 것”이라고 했다. 세종은 호연지기에 큰 능력을 가진 아들을 인정했다. ‘아들 중에 수양대군만이 효성스럽고 재능이 있다. 정대하고 질박하므로 참으로 비범하다. 만약 재주를 과신하고 제멋대로 한다면 누가 규제할 수 있겠는가. 재능이 있으면서도 허물을 짓지 않는 것은 어질기 때문이다.’ 세종은 아들의 비범한 능력만큼이나 형제의 우애가 깊기를 바랬다. 그만큼 둘째아들의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큰 아들인 문종과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세조)을 불러 유언을 했다. 평생 좋은 관계를 당부했다.
“너희 둘에게 말한다. 신하들은 임금이 죽는 그 날로 형제들의 허물을 공격하는 법이다. 내가 죽는 날, 너희 형제의 허물을 말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 너희는 내 말을 잊지 말고 항상 친애하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를 이간시키지 못할 것이다.” 세종은 영특한 수양대군을 12년에 성균관에 입학시켜 체계적인 왕자교육을 받게 했다. 집현전 학자들에게 교육을 담당하게 하고, 때로는 임금이 직접 교육을 했다. 수양대군은 빼어난 능력을 보였다. 아버지는 친히 흡족한 마음에 아들에게 자치통감 책을 내려 주며 격려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수양대군은 고금의 서사(書史)와 성리학에 정통했음에도 “천하의 서적을 다 읽지 않고서는 다시 활을 잡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공부의 재미에 푹 빠진 것이다. 세종은 장성한 수양대군에게 주자소에서 편찬 사업과 함께 정치 감각을 키워준다. 수시로 왕릉을 살피게 하는 한편 명나라 사신 접대를 맡긴다. 세종은 심혈을 기울이는 치평요람 편찬 책임자로 그를 임명했다. 치평요람은 조선과 중국 정치에서 본받고 경계해야 할 사례를 정리한 책이다. “천하의 서적 다 읽지 않고서는 다시 활 잡지 않겠다” 이 무렵부터 세종은 신하들에게 밀명을 내리는 등 긴밀한 정치 사안에도 간여시켰다. 임금이 요양차 궁궐을 비울 때는 그에게 도성 호위 책임을 맡겼고, 젊은 나이임에도 왕실을 관장하는 종부시 제조로 임명했다. 이는 왕실에서의 그의 위상을 말해준다. 임금은 27년(1445년) 1월 18일에 세자에게 양위를 발표한다. 이 때 수양대군이 임금의 뜻을 신하들에게 전달했다. 정치 핵심에 관여한 것이다. 세종은 무예에 출중하고 대범한 수양대군에게 학문 외교 군사 정치 등 실제적인 제왕수업에 버금가는 교육을 시킨 셈이다. 또 문학과 정치 감각이 뛰어난 안평대군도 비슷한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는 새로운 나라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는 왕실이 탄탄해야 한다는 계산으로 볼 수 있다. 태종과 세종 시절에 왕권이 강화됐지만 개국 초창기 왕실은 흔들릴 가능성도 충분했다. 태종과 세종은 많은 왕자 생산이 나라를 튼튼히 하는 기반으로 봤다. 그렇기에 뛰어난 왕자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학문만 아니라 정치·외교·농업·군사 등의 다양한 교육을 한 것이다. 수양대군의 등극은 아버지 세종의 전반적인 능력 교육 덕분으로 볼 수 있다. 세종은 큰아들인 세자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원하지 않은 경쟁구도를 만든 셈이다. 결과적으로 문종과 둘째인 수양대군, 셋째인 안평대군도 모두 왕의 자질을 갖춘 왕자로 키웠기 때문이다. 임금이 된 수양대군은 훗날 아들에게 삶의 지침으로 삼을 훈사를 주며 말했다. “나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마음을 따르고 명령에 어긋남 없이 행동했다. 가르치는 바와 경계하는 바를 좇아 다른 일은 모르고 밤낮으로 바빴다.”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아버지와 같은 교육법을 아들에게 적용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반드시 비유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세조는 훈사(訓辭)를 지어 세자가 항상 외워 경계하도록 했다. 그 내용은 첫째, 늘 변함없이 한결같은 덕을 가질 것이다. 둘째, 신(神)을 공경하여 섬길 것이다, 셋째, 간언을 받아들일 것이다. 넷째, 참소를 막을 것이다. 다섯째, 사람을 제대로 쓰는 일이다. 여섯째, 사치하지 말 것이다. 일곱째, 환관을 부리는 일이다. 여덟째, 형벌을 삼가는 일이다. 아홉째, 문과 무를 조화시키는 일이다. 열 번째, 부모의 뜻을 잘 좇는 것이다. - 글쓴이 이상주 서울시민대학에서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을 강의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또 여러 단체에서 ‘조선 명문가 독서 이야기’, ‘부모와 아이가 함께 듣는 세종의 공부법’, ‘CEO책쓰기’, ‘내 삶의 스토리 글쓰기’, ‘합격 자기소개서 작성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문화위원으로 지은 책은 ‘세종의 공부’,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10대가 아프다’ 등이 있다. 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