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가 제대로 맛을 내려면 배추는 다섯 번 죽어야 한다. 배추는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죽는다. 소금에 절여지면서 또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돼 또 죽고, 장독에 담겨 땅에 묻히면서 또 죽는다. 김치는 겉절이와 차원이 다르다. 농익은 김치는 죽어서도 맛을 내지만, 폼나는 겉절이는 살아서도 그저 그렇다. 김치는 손맛이자 마음의 맛이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 맛이다. 그래서 겉절이 아닌 ‘김치 인생‘을 살라 했다. 김치는 세계 5대 건강식품이다. 일본 낫토, 인도 렌즈콩, 그리스 요구르트, 스페인 올리브유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김치는 우주다”…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재 등재 임박 이어령 선생에게 김치는 단순한 김치가 아니라 우주다. 김치를 먹는 건 빨갛고 파랗고 노란 바람개비 모양의 삼태극(三太極)을 먹는 것이고, 삼태극을 먹는 건 우주를 먹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내가 우주가 되고 우주는 내가 된다고 했다. 이른바 김치예찬이다. 김치와 김장문화가 곧 세계인류무형문화재가 된다. 한 나라의 대표 음식문화가 무형문화재에 등재되는 건 세계 최초다. 12월2일∼8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리는 제8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전해질 낭보가 기대된다. 종묘와 종묘재래악 등 15건의 인류무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김장문화를 추가하면 모두 16건을 보유하게 된다. 세상에 겉절이 아닌 ‘김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여럿 있지만 김창수 삼성화재 대표와 김윤규 청년장사꾼 대표가 눈에 띤다. 실패를 경험하고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들이다. 김창수 대표는 중·고교를 모두 1차에서 낙방한 후 2차로 들어갔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해군장교로 복무하며 지옥훈련을 받았다. 일주일 동안 잠 안 자고, 시궁창을 딩구는 훈련을 받으며 ‘간절하게 원하면 이뤄진다’는 신념을 터득했고 마침내 대기업 수장에 올랐다. 올해 26살의 청년장사꾼 김윤규 대표는 어린 시절 친구들이 신고 다니는 나이키 운동화를 가져보는 게 꿈이었다. 홍익대를 휴학한 후 일찌감치 장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전역한 지 3일 만에 야채가게에 취직해 새벽별 보고 출퇴근을 반복했다. 가락동시장에서 물건을 떼어오는 날엔 트럭에서 토막잠을 자기 일쑤였다. 종로구 내자동 금천교시장에 ‘열정감자’를 내는 등 레드오션 요식업계에서 다양한 점포로 꿈을 실현하고 있다. 기업들, 시름에 빠진 농민 도와…농협이 제 역할 해야 김장철이다. 올 배추농사는 37년 만의 풍년이다. 그러나 웃음이 넘쳐야 할 농가가 되레 ‘풍년의 역설’로 고생하고 있다. 배추 등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당 4000원씩 키운 배추가 원가에도 못 미치는 2000∼3000원에 거래되고 있다. 배추밭 갈아엎는 농가도 속출하고 있다. 농산물 수요예측 실패에 대한 원망이 거세다. 이런 가운데 기업들이 농가의 잉여 농산물을 사주는 방식으로 십시일반 농민돕기에 나서고 있어 흐뭇하다. 삼성그룹은 최근 사장단 회의에서 매년 개최해 온 김장 나눔 행사의 규모를 대폭 늘리기로 했다. NH생명은 감귤 10만 박스를 구입해 산지가격 하락을 막고 있다. 롯데마트는 전국의 마늘, 양파 가공업체에 원재료 기준15톤 규모의 주문을 냈다. 중소기업도 농민의 눈물 닦기에 동참하고 있다. 제화업체 안토니는 본사가 있는 고양시에서 배추 증정 행사를 갖기로 했다. 배추를 3박스 이상 구입하는 시민에게 자사가 구입한 배추를 1박스 더 주기로 했다. 5000만원을 들여 1만 가구에게 혜택을 줄 예정이다. 기업들의 잇따른 소비 촉진 운동은 농가의 어려움을 일시적으로 해결해 주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생산자 단체인 농협의 수급조절 역할을 강화해야 옳다. 풍년곡식은 모자라도 흉년곡식은 남는 법이다. 위기는 곧 기회다.(勿失好機) - 김경훈 편집인 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