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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작가의 ‘세종의 독서와 공부’]지식 독점인가, 공유인가

한글창제는 세종의 소통의 의지 산물, 지배세력 반대 물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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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65호 이상주 역사작가⁄ 2014.02.10 14:06:26

“사람마다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세종실록 28/09/29>

한글과 금속활자, 포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정보의 공유다. 소수에 의해 주도되던 지식을 대중화한 도구다. 셋의 출현으로 사회는 혁명적인 변화를 맞았다. 한글 창제는 서민과 여성의 교육을 가능하게 했고, 금속활자는 산업혁명의 모태가 됐다. 인터넷은 무한 지식 공유시대를 열었다. 한글은 세종의 지식공유와 소통의 의지였다.

세종의 뜻은 어제(御製)에 분명히 설명돼 있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는 지식이 한문에 박식한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한자 외에도 향가의 표기글자인 향찰, 관리들의 행정 기록에 주로 사용된 이두가 있었다. 그러나 한자를 빌어 쓴 우리말이기에 배울 수 있는 계층이 한정됐다. 대다수 백성에게는 어려운 한자도, 한자를 활용한 우리말 표현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그림에 불과했다. 사회는 소수의 식자층과 다수의 비식자층으로 이분화 되었다.

이는 유교통치의 근간이기도 했다. 조선과 중국, 베트남 등 유교 문화권 전통개념에는 성인(聖人) 다음에 군자(君子-대인大人)가 있다. 성인과 군자는 지배층이다. 정신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 밑에 소인(小人)이 있다. 피지배층으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지배층은 지식과 도덕을 베풀어 어리석은 소인을 교화시키는 게 임무다. 소인은 노동력과 세금으로 대인의 지식 나눔에 대가를 지불한다. 맹자가 생각한 전통 유교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사회적 분업체제였다. 조선의 건국세력인 신진 사대부들이 생각한 국가 모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익히기 쉬운 한글의 보급은 지식의 대중화 가능성을 의미했다. 지식 향유층인 사대부들에게는 위상이 흔들릴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최만리 등 한글창제 반대세력에는 지배층의 특권 약화, 기존 사회질서의 흔들림을 우려한 심리가 숨어있다. 오랜 시간 공부해야 하는 한문은 지배층만이 향유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과거는 농민도 볼 수 있지만 양반 중에서도 권력을 쥔 계층에서 독점하다시피 한 것은 이 같은 이유다. 세종이 한글 창제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한 것은 지배층의 집단 반발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과 유교중심의 세계관에 몰입된 사대부들의 반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세종은 백성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지식 공유의 차원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세자와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 자녀들과 성삼문, 정인지, 신숙주 등 한글창제에 우호적인 일부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오랫동안 음운과 문자 연구는 25년(1443년)에 창제 성공에 이어 3년 뒤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은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짓고,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명명했다.

세종의 한글창제는 크게 세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전 백성의 교육이었다. 글자를 알게 해 문맹에서 벗어나게 함이다. 쉬운 글 창제는 문자를 몰라 피해 받는 백성이 없게 하는 지름길로 생각했다. 둘째, 충효의 강화를 통한 사회 안정이었다. 정치적 통합의 일환으로 한글을 생각했다. 효행록 등을 간행해 사회에 건전한 기풍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새로운 문자가 필요했다. 셋째, 소통이다. 백성이 글을 알게 되면 생각의 수준이 높아진다. 문화적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이는 궁극적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단절이 아닌 소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2013년 10월 8일 오후 경기도교육청에서 한글날을 축하하기 위해 김상곤 경기도교육감과 학생 등이 한글 자, 모음을 흔들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창제 소식이 알려지자 예상대로 반대상소가 올라왔다. 창제 1년 뒤인 26년(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그들의 요지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사대를 하는 중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하나는 한글이 퍼지면 관리가 한문을 공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마지막으로 세자 향의 학습 지장이다. 세자는 한글 창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공자와 맹자 공부에 전념해야 할 세자가 한글에 빠져 시간낭비를 하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한글, 임진왜란 때 빛나…선조 때 한글교서 반포

하지만 세종은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최만리 등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희가 음운을 아는가.” 임금은 이와함께 한글 반대를 한 김문은 국문을 하고, 정창손은 파직을 시켰다. 김문은 한글 제작에 찬성했다가 반대한 게 이유였다. 또 정창손은 한글로 백성을 가르쳐야 교화가 되느냐고 반박해 괘씸죄에 걸렸다.

세종은 반대를 정면 돌파하며 한글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노력의 결과물 중 하나가 관리선발에서 시험과목 채택이다. 세종은 여자들도 배우기를 권장했다. 문자 해득의 중요성을 말했다.

한글은 왕실 여성부터 배웠다. 왕실여성들은 편지 등 일상사는 물론이고 정치적인 일도 한글을 사용했다. 대왕대비가 수렴첨정을 하는 경우, 발 안에서 언문 교서를 내렸다. 이를 신하들이 한문으로 번역했다. 그 결과다 왕도 왕실 여인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글 이해는 불가피했다.

만 백성의 정보 공유를 위해 세종이 보급한 한글은 임진왜란 때 빛이 났다. 선조가 한글로 된 교서를 반포한 것이다. 선조는 민심을 달래고, 의병활동을 촉진시키기 위해 백성이 이해할 수 있는 한글을 국가문서로 사용한 것이다.

세종 시대에서 150여년이 지난 선조 때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소통수단으로 한글이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의 뜻인 정보 독점이 아닌 정보 공유가 서서히 진행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성의 문자해득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왕조시대에 세종은 만백성의 지식 공유를 추구한 선구자였다.

글쓴이 이상주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칼럼니스트 양성과정’을 강의하고 있다. 서울시민대학에서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을 강의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또 여러 단체에서 조선 명문가 독서 이야기, 부모와 아이가 함께 듣는 세종의 공부법 등을 강의하고, CEO 책쓰기, 경영인 칼럼쓰기, 청소년 칼럼쓰기를 지도하고 있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문화위원으로 지은 책은 ‘세종의 공부’,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10대가 아프다’ 등이 있다. 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 이상주 역사작가 (정리 = 박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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