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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60)]‘강남의 허파’ 대모산 구룡산길

현대차 품은 한전부지,광평대군 피눈물 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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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08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4.12.11 09:01:45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지난 가을 강남의 노른자위 땅 한전(韓電)부지가 어마어마한 값에 팔렸다. 축구장 12개 넓이에 해당한다는데 평당 4억800만원이 넘는 가격에 전체 땅값이 자그마치 10조50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대단한 거래였다.

그런데 이 경제적 큰 일이, 어울리지 않게 내게는 우리 시대에 살다간 한 선승(禪僧)과 600년 전에 살다간 한 왕자를 생각나게 했다. 법정(法頂)과 광평대군(廣平大君)이다. 70년대에 480원 주고 산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꺼내 본다. 회심기(回心記)란 글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 이 땅 이야기가 있다.

“3년 전 우리가 머물고 있는 절의 경내지(境內地)가 종단(宗團)의 몇몇 사무승들의 농간에 의해 팔렸을 때, 나는 분한 생각 때문에 며칠 동안 잠조차 이룰 수 없었다. 전체 종단의 여론을 무시하고 몇몇이서 은밀히 강행해 버린 처사며, 수천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눈 앞에서 넘어져 갈 때,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도저가 산을 헐어 뭉갤 때, 정말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한 선승(禪僧)을 이렇게까지 힘들게 했던 그 절은 어디였으며 그 땅은 어디였을까? 강남 봉은사(奉恩寺)와 코엑스, 한전부지 일대였던 것이다. 그 때 10만평을 팔았다는데 평당 가격이 5300원이었다 한다. 평당 5300원과 4억800만원… 법정스님은 그 힘든 마음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이란 생각으로 털어냈다.

그래, 봉은사도 본래무일물이었을 터이니 그 땅은 또 어떤 인연으로 봉은사로 온 것일까?  550여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 보자. 1471년(성종2년) 9월 실록기록에는 이 땅에 대한 힌트가 있다.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가 죽자, 그 부인(夫人) 신씨(申氏)가 머리를 깎았고, 그 아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가 죽자 그 부인 역시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신 등이 일찍이 삼가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근래에 광평대군의 부인이 그 양모(養母) 왕씨(王氏)와 광평대군 부자(父子)를 위하여 각각 불사(佛舍)를 세우고 영당(影堂)이라 일컫고, 그 전지와 노비의 반(半)을 시납(施納)하니, 전지가 모두 70여 결(結)이고 노비가 모두 930여 구(口)이었으나, 병술년 이후에 출생한 자를 모두 속하게 하였으므로, 지금 이를 계산하면 이미 1000여 구(口)가 넘습니다.
(廣平大君璵沒, 其夫人申氏剃髮, 子永順君溥沒, 其夫人亦如之, 臣等竊嘗怪.
近廣平夫人爲其養母王氏及廣平父子, 各立佛舍, 稱爲影堂, 將其田、民之半施納焉. 田地共七十餘結, 奴婢共九百三十餘口, 而以丙戌年以後之産竝屬焉, 以今計之, 已過一千餘口矣.)”

▲광평대군 내외묘


세종의 5째 아들 광평대군은 실록에 의하면 창진(瘡疹: 부스럼병)에 걸려 20살의 나이(세종 26년, 1444년)로 세상을 떠난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이나 대동기문(大東奇聞)에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군이 어릴 적 관상을 보았는데 굶어죽을 것이라 했다한다. 왕자가 굶어 죽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대군은 생선을 먹다가 가시가 목에 걸려 결국은 굶어 죽었다(爲魚骨梗喉 不食而卒)는 것이다. 그는 6달 된 아들과 젊은 아내(申自守의 딸)를 남겼다. 세종 내외는 잘 우는 어린 핏덩이 손자를 궁중에서 5살까지 키웠다. 그 때나 지금이나 지위의 높낮음을 떠나 손자 사랑은 이와 같았다.

대군은 언주면 학당리(강남구 삼성동 지금의 선정릉 자리)에 묻혔다. 젊은 과수댁 신씨(申氏)는 불심이 깊었는데 묘소 동쪽에 견성암(見性庵, 見性寺)이란 암자를 지어 대군의 원찰로 삼았다. 불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후에 신씨가 아들 영순군에게 필사토록 하여 이 절에서 목판인쇄로 발행한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성종 1년, 1470년)는 보물 1104호 귀중본으로 남겨졌다.

▲선정릉. 도심공원이 되었다.


봉은사, 요절한 광평대군 부자 위해 세운 불사

영특하게 잘 자란 영순군(永順君)은 주위의 기대를 모았는데 불행히도 27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 무슨 벼락이란 말인가. 생과부가 된 며느리는 일찍이 머리를 깎은 시어머니를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재산이 무슨 큰 소용이란 말인가. 후손들이 쓸 만큼 남기고 견성사에 희사하였다. 땅 70결 (20만평이 넘는다)과 노비 930명이었다.

이 견성사는 어찌 되었을까? 성종이 승하하자 광평대군의 묘소자리(학당리)가 성종의 릉(宣陵)으로 정해졌고 대군의 묘소는 아드님 영순군이 잠들어 있는 광주군 이을언리 수토산(현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으로 이장되었다. 견성사는 헐어야 한다는 조신(朝臣)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나 성종 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지켜냈다. 연산군 4년(1498년) 절을 크게 중창하고 봉은사(奉恩寺)로 사명을 바꾸어(연산군일기, 봉은본말사지) 헌릉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이 되었다.

한편, 서삼릉 구역에 제1계비 장경왕후 곁에 잠들어 있던 중종이 제2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이곳 선릉 동쪽으로 천릉되어 정릉(靖陵)이란 이름으로 자리잡게 되자(명종 17년, 1562년), 봉은사(견성사)는 부득이 동쪽 수도산으로 이전하니 지금의 봉은사가 자리잡은 곳이다. 다음해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자 위패를 봉은사에 모셨다. 명실공이 왕실의 보호를 받는 큰 절이 된 것이다.

▲광평대군을 위한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


연산군일기에는 우리가 폭군으로만 알던 연산군의 다른 모습이 보인다. 봉은사에 소금을 내려주고, 먼 곳에 있는 전세(田稅)를 가까운 고을의 전세(田稅)로 바꾸어 주었다. 연산군은 봉은사에게는 고마운 임금이었던 것이다.

2호선, 분당선 선릉역에서 내려 선정릉을 둘러본다. 이제는 도심 한 가운데 시민들의 공원이 되었다. 견성사 절터는 아쉽게도 흔적이 없다. 온 김에 봉은사도 들려 본다.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승과(僧科) 시험을 거쳐 난세에 헌신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곳, 법정스님이 마음공부를 했던 곳, 움켜쥐고 빼앗으려고 세상을 어지럽게 했던 곳, 광평대군가(家)와 연산군이 보살펴 주어 많은 땅을 갖고 있었던 그 곳, 내자(內子)가 정성 드리러 다닌 그 곳….

이제 3호선을 타고 수서(水西)로 향한다. 광평대군과 신씨부인이 잠든 곳이다. 수서역 6번 출구를 나서면 대모산(大母山), 구룡산(九龍山) 종주길이 시작되고, 7,8부 능선을 걷는 서울둘레길 출발점이다. 산을 중심으로 좌측 교수마을에는 탄허기념박물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우측 궁촌(宮村)에는 광평대군 묘역이 있다. 또한 대모산 남녘으로는 헌인릉이 자리하고 있는데 모두 둘러볼 만한 곳이다.

▲수서동 절터. 봉헌사지일까.


6번 출구를 나서 좌측(남쪽) 쟁골마을(자곡동)으로 향한다. 가까운 버스 한 정거장 거리이다. 마을 입구에는 탄허기념박물관 이정표가 붙어 있다. 400m 거리인데 포장길을 따라 마을 남쪽 끝에 있다. 예지력이 뛰어났다 하는 당대의 석학이었다. 건물은 설계가 잘 된 깔끔한 구조에 현대적 느낌이 물씬 풍긴다. 박물관이라기보다는 기념관의 성격이 강한데(向上一路) 일필휘지(一筆揮之) 써내려간 선사의 필력이 느껴지는 휘호들이 인상적이다. 잠시 참선(명상)하기에도 좋을 듯하다.


성종 비 정현왕가 지키고, 연산군이 중창한 왕실사찰

기념관을 돌아 나오면 자비정사라는 안내판 방향 길로 접어들어 밭 사이 길을 통해 교수마을로 들어가자. 마을 서쪽 끝까지 가면 작은 밭길로 해서 대모산으로 연결되는 길이 보인다. 이 길 250m 오르면 대모산 능선길인데 이 길이 쟁골과 궁마을을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고갯마루 안내판에는 교수마을(쟁골) 250m, 궁마을 500m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수서에서는 900m, 대모산 정상까지는 2050m가 남은 곳이다.

대모산 능선길을 버리고 잠시 궁마을로 내려간다. 이제는 다니는 사람이 없어 고갯길은 갈잎으로 덮였다. 100m 내려오면 평탄지에 묵은 밭이 나타나고 바로 앞으로는 보급자리 주택 택지공사 현장이다. 다행히 공사장은 펜스로 구분되어 있어 산란하지는 않다.

▲대모산 불국사


이곳 묵은 밭 주위로는 많은 기와파편이 흙속에 박혀 있다(수서동 539-1 주위). 어골문(魚骨紋)과 수파문(水波紋)이 많은데 기조사에 의하면 ‘元王’이란 명문도 확인되었다 한다. 출토된 기와편과 자기편들로 볼 때 이 절이 유지되었던 시기는 고려부터 조선 중후기까지로 추정하고 있다. 구체적 문헌이 없어 정확한 절 이름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전혀 힌트가 없는 것은 아니다. 1872년 간행된 군현지도에는 대모산 남쪽에 인릉과 헌릉이 그려져 있고 동쪽으로 봉헌사(奉獻寺)가 그려져 있다. 중정남한지에도 봉헌사는 대모산 기슭에 있다(在大母山麓) 했고, 광주읍지에도 봉헌사는 대왕면에 있다(在大旺面) 했으니 정황증거는 되는 셈이다.

운허노사는 봉헌사를 봉운사(鳳雲寺)라고도 했는데 그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으니 궁금하다. 한편 헌인릉과 연결지어 본다면 봉헌사의 기능도 짐작할 수 있다. 흔히 능침사찰로 봉은사(奉恩寺), 봉선사(奉先寺), 봉국사 (奉國寺)라는 이름을 썼으니 능침사찰의 기능과도 연결지어 볼 수 있다.

▲대모산 정상 삼각점


봉은본말사지 불국사편에는 봉헌사지가 동쪽 5리쯤에 있는데 헌릉의 원찰(願刹)이었다고 했으니 고려 때부터 있던 절을 후에 헌릉의 원찰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봉헌사라 이름을 고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 궁금증은 놓아두고 광평대군 묘역으로 향한다. 길 따라 500m 쯤 내려가면 SK주유소가 있는데 길을 건너면 광평대군 묘소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안 쪽으로 잘 가꾸어진 광평대군 묘역에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700여 기의 대단위 묘역이 있다. 이곳을 방문하면 종회(宗會)에 들려 설명도 듣고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가장 중요시 되는 묘역은 광평대군 내외와 아드님 영순군 묘, 또 한 사람 무안대군(撫安大君 芳蕃 )의 묘소가 있다.

▲무안대군 묘소


무안대군은 누구이며 왜 여기에 묻혀 있는 것일까? 무안대군은 태조 이성계의 7번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덕왕후 강씨이다. 조준, 배극렴 등의 반대로 내정되었던 세자 자리도 동생 방석에게 넘어 갔으며, 1차 왕자의 난 때 조준 등에게 살해당하니 나이 18세였다. 후사(後嗣 뒤를 이을 후손)가 없었는데 세종께서 이를 가슴 아프게 여겨 다섯째 아들 광평으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했던 것이다.

이 묘역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일은 광평대군 내외분의 묘소가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좌우가 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묘소나 합장묘에서 남녀의 위치는 묘소 앞에서 바라 볼 때 남자가 좌(左), 여자가 우(右)에 위치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 묘소는 반대로 자리잡고 있다.

종친회에 그 이유를 여쭈어 보았건만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예절방위에 대해 후기처럼 시시콜콜 따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인릉 순조 내외릉이다


이제 묘역을 떠나 대모산 능선길로 돌아온다. 대모산 정상까지는 약 2km의 능선길이다. 상봉약수 갈림길, 래미안강남힐스 갈림길, 헌인릉 갈림길, 로봇고 갈림길, 실로암약수 갈림길, 성지약수 갈림길을 지나 드디어 대모산 정상에 닿는다. 비록 산은 낮아도(293m) 이 지역의 주요한 산으로 대접 받았으며 대부분의 지리서나 군현지도, 읍지 등에 등장한다.

1999년 한양대에서 시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둘레 567m에 달하는 후기신라 시대 석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다. 봉은본말사지 불국사편에도 대모산성지가 절 뒤 산봉우리에 있는데 백제고성인 듯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 형태의 토기도 출토되고 초기철기시대 주거지도 일부 드러났다고 하니 역사의 흔적도 가지고 있는 산이다.


광평대군 내외와 아들 옆엔 무안대군(태조 7남 방번) 잠들어

이제 정상을 지나 전망바위 방향으로 잠시 이동하면 우측 급격한 사면 내리막길이 보인다. 서울둘레길로 내려가는 길이다. 500m 하산, 서울둘레길과 만난다. 수서역 3km, 능인선원 4.4km 남았다는 안내판도 만나는데 능인선원 방향으로 잠시 나아가면 연리목(連理木)도 만나고 이어서 일원터널 0.95km 안내판을 지나면 우측으로 옛 경작지 작은 묵은 밭이 나타난다. 이곳이 또 하나 이름없는 옛절터이다(일원동 246-12). 특징은 없다.

앞쪽으로는 잠시 후 대모산에 남은 유일한 옛절 불국사(佛國寺)에 닿는다.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이곳 불국사는 고려 공민왕 2년(1343)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박씨 성을 가진 농부가 밭에서 약사석불(藥師石佛)을 발굴하여서 이 절에 봉안했다 한다. 지금도 법당에 모셔져 있는데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이 본말사지에는 대모산에 있는 또 다른 절터가 기록되어 있는데 절 동남쪽 7리쯤에 1900년대 초에 헐어버린 용덕사지(龍德寺址)가 남아 있다 한다. 교수마을 자비정사 아래 밭에 몇 개의 자기편과 기와편이 간간히 보이더니 아마도 그곳이 아닌가 모르겠다. 방향이나 거리가 이 기록과 얼추 들어맞는다.

이제 서울둘레길을 따라 구룡산으로 향한다. 길은 한없이 편안하다. 일원터널 방향 갈림길을 지나 J1안내판이 서 있는 곳까지 이르면 대모산에서 내려오는 능선길과 만난다. 앞으로는 헌인릉 갈림길부터 시작된 철 펜스가 이어진다. 철 펜스 너머에는 헌인릉 능역과 국가기관이 있어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 이곳에서 구룡산 정상까지는 1km 남았다. 펜스를 좌로 끼고 서쪽으로 향하여 땀 좀 흘리면 이내 J3안내판이 서 있는 구룡산 정상이다. 정상 바닥에는 정상판이 박혀 있다. 산 높이는 308m로 대모산보다 오히려 15m나 높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모산 주봉은 이곳인 셈이다.

▲구 영릉이라는 곳 회격묘


누군가 국수봉이라 쓴 작은 봉우리와 돌무지를 지나면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그 곳은 강남 일대를 널리 조망할 수 있는 확 트인 조망명소가 된다. 해 저무는 서울의 고층빌딩도 운치가 있다. 창문 창문마다 사연을 가진 이들이 불을 밝히는 시간이다. 전망바위를 내려와 잠시 바위 뒤로 돌아가면 구룡산에 숨어 있는 작은 석굴(石窟)이 있다. 등산로에서는 알 수 없는 곳이라 아는 이들이 거의 없는 곳이다. 갑자기 비라도 쏟아지면 피해갈 수 있는 곳이다. 이제 한국연구재단과 코이카 방향 안내판을 따라 하산이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코스 헌인릉으로 향한다. 대모산 구룡산에 철 펜스가 없었다면 능선길에서 다녀오면 좋으련만 하는 수없이 길을 건너 버스로 이동한다. 세곡동 방향버스가 그곳을 지나는데 헌인릉 입구에서 하차한다. 길을 건너 헌인릉길로 들어서면 재실이 나오고 이내 헌인릉에 닿는다.

능(陵) 관람은 먼발치로만 하게 되는데 관리사무실에서 촬영신청을 하면 능역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관람할 수 있다. 비석과 석물들을 자세히 살피고 나중에 쓸 사진자료를 촬영하려면 이렇게 할 것을 권한다.


세종 영능이 대모산서 여주로 천장한 까닭은?

헌인릉은 변화가 많았던 능역(陵域)이었다. 능역 동쪽 산줄기에 원경왕후 민씨와 태종이 묻혀 헌릉(獻陵)이 된 후, 그 서쪽에 소헌왕후와 세종이 한 무덤 안에 두 개의 관에 묻혀 영릉(英陵)이 되었다. 그런데 그 아드님 문종이 단명하였고, 단종의 불행한 일이 있었고,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20세에 세상을 떠나고,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이 요절하는 등 왕실에 흉흉한 일이 계속됐다. 이러자 영릉 능자리가 나쁘다는 주장이 거세지면서 급기야는 세종의 능 영릉을 여주로 천장(遷葬)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1515년(중종 10년) 사망하자 헌릉 서쪽에 장사지내고 희릉(禧陵)이라 했는데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견이 있어 1537년(중종 32년) 서삼릉 능역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니 대모산 아래 헌릉 능역에는 기존의 헌릉과 두 개의 능자리(영릉, 희릉)이 남게 되었다. 그 후 세월은 흘러 정조의 아드님 순조가 돌아가셨는데 파주 탄현의 인조와 인열왕후 능인 장릉(長陵) 곁에 묻혔다.

그런데 풍수 상 문제가 있다 하여 1856년(철종 7년)에 지금의 헌인릉 능역 인릉 자리로 천장하게 되었다. 이 때 옮길 자리를 파다 보니 옛 능의 흔적이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적어도 영릉이거나 희릉의 옛 자리일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헌인릉에 대한 능역의 문제는 사람들에게 잊혀 졌는데 1973~74년에 걸쳐 헌인릉 서쪽 국가기관 산줄기에 있던 옛 능역을 발굴한 후 석물을 수습하여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구 영릉석물로 전시하였으며 그 자리를 구 영릉(세종대왕 초장지)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문헌으로 보나 여러 정황으로 보나 세종대왕 초장지로서는 문제가 많이 노출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정신문화연구’에 발표된 김이순씨나 안경호씨의 논문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2009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과 문화재청이 재발굴을 했는데 그 자리는 회격(灰隔)으로 된 한 사람 무덤자리임이 밝혀졌으니 두 사람 합장묘에 석관을 쓴 세종대왕 초장지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보물 838호 세종대왕석물도 다시 살펴야 된다는 것이다. 김이순씨 논문에는 그것은 구 희릉(장경왕후 릉) 석물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현재 인릉에 서 있는 석물이 구 세종대왕릉 석물이라는 주장인데 전문가들이 결론을 내 줄 것이지만 헌인릉에 가시거든 유심히 보아 두시라. 무덤자리 풍수에서 비롯된 올가미에 걸린 우리 시대 사람들의 한 단면을 헌인릉은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다. 세종대왕님도 진실을 원하실 것이니까.


- 교통편

3호선 수서역 6번 출구

- 걷기 코스

수서역 6번 출구 ~ 쟁골(자곡동 교수마을) 탄허기념박물관 ~ 수서동 절터(봉헌사지?) ~ 광평대군묘역 ~ 대모산 능선길 ~ 대모산 정상 ~ 불국사 ~ 구룡산 정상 ~ 코이카 (길건너 버스) ~ 헌인릉.

※ 옛절터 가는 길은 이번 60회로 종료합니다. 그 동안 졸고를 사랑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동안 CNB저널에 연재한 ‘옛절터 가는 길’과 ‘이야기가 있는 길’은 향후 수정 보완 과정을 거쳐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다음 테마로 재회할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한성 배상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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