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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울림, 안중근을 만나다’

안중근 순국 105주기 추모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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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25호 왕진오 기자⁄ 2015.04.06 14:32:15

▲안중근 의사 특별전 ‘울림, 안중근을 만나다’ 전시 전경. 사진제공 = 문화체육관광부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왕진오 기자) “동풍이 점점 차가운데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를 3일 앞두고 안중근(1879~1910년) 의사가 읊은 ‘장부가’의 한 구절이다. 그가 이토록 강렬한 마음으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눈 까닭은 무엇일까. 하얼빈 의거는 안중근의 생애를 말하는 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사건이다.

그날의 이야기에는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안중근이 희미해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들이 숨어 있다. 무엇이 안중근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으며, 어떻게 그날의 의거가 가능했을까. 안중근 삶의 여정을 통해 의거의 목적인 ‘국권 회복’과 ‘동양 회복’에 대한 염원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관장 김왕식)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 특별전 ‘울림, 안중근을 만나다’를 3월 31일∼6월 7일 개최한다. 안중근의사숭모회-안중근의사기념관과 공동주최하는 전시는 “한국이 독립하면 내 시신을 조국 땅에 묻어달라”던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5주기를 맞아 그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한다.

▲‘울림, 안중근을 만나다’전을 찾은 안중근 의사 외손녀 황은주 씨. 사진 = 왕진오 기자

하얼빈 의거 후 일본에 체포된 안 의사는 신문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상을 적은 문서를 통해 의거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 한국인들이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요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라.”

영웅의 궤적을 통해
숭고한 업적과 사상을 되돌아보다

안중근에게 하얼빈 의거는 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150일 간의 옥중투쟁을 통해 일본의 침략성을 밝히고,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해 열강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중근의 공판은, 시작 이전부터 사형이 결정되어 있었으며, 불법적인 것이었다. 일제의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공판이었다.

▲‘울림, 안중근을 만나다’에 공개된 안중근 의사 관련 유물. 사진 = 왕진오 기자

뤼순 감옥과 공판정은 총성 없는 또 다른 의거의 현장이 됐다. 그곳에서 안중근이 낸 목소리는 하얼빈 의거의 목적, 그가 염원한 동양평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안중근의 많은 글은 옥중에서 직접 쓴 것이다. 동양 평화를 염원하며 쓴 ‘동양평화론’, 자신의 생애를 솔직하게 담아낸 자서전 ‘안응칠 역사’가 그러하다.

현재까지 두 글은 모두 필사본만 전하고 있다. 실물 그대로의 안중근을 만날 수 있는 유물로는 그의 유묵이 유일하다. 현재까지 실물이 확인된 60여 점의 유물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은 1910년 2월 14일 이후에 쓴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보물 제569-13호 ‘박학어문약지이례(博學於文約之以禮)’와 보물 제 569-26호 ‘임적선진위장의무(臨敵先進爲將義務)’, 보물 제569-21호 ‘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과 ‘경천(敬天)’ 유묵은 주목할 만하다.

당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지식인들이 안중근의 삶과 사상을 예찬하는 추모 글귀를 남겼다. 이외에도 전기, 영화, 교과서를 통해서도 안중근을 만날 수 있다. 10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안중근은 우리 앞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애국계몽 운동에서 의거에 이르기까지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한 안중근 의사의 삶의 여정을 관련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하얼빈 의거 바로 다음날 발행된 경성일보 호외. 기사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지 약 1시간 후에 사망하였으며 안중근이 동청철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는 내용이 게재됐다. 사진 = 왕진오 기자

특별전이 진행되는 박물관을 찾은 안중근 외손녀 황은주(87) 씨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인데 외할아버지의 유해를 못 모신 것이 안타깝다. 유해가 어디 있는지 일본에서도 협조하지 않고 있다. 하얼빈에 묻힌 것만 알려졌지 아무것도 모른다”며 안타까워했다.

안 의사 외손녀 “광복 70년 되도록
한국 정부는 할아버지 시신 못 모셔”

그는 이어 “유해 없이 추모식을 한다는 것도 안타깝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유해를 한국에 묻어달라고 했는데 한국 정부가 유해 반환에 대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아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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