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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면 영화평 ‘동주’] 흑백으로 재조명되는 시인과 정치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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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72호 이상면 문화예술 편집위원⁄ 2016.02.29 18: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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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이상면 문화예술 편집위원/연극영화학 박사) 일제강점기 시인 윤동주(1917~45년)가 지금으로부터 71년 전 세상을 떠난 다음 날인 2월 17일에 맞춰 개봉된 영화 ‘동주’(이준익 감독/루스이소니도스 제작, 흑백, 110분)가 젊은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흑백 필름에 저예산(약 5억 원)으로 제작돼 상업적 성공을 지향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개봉 후 일주일이 지난 시점까지 약 32만 명이 관람했고 예매율 5위인 가운데 상영관이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또한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본 재출간 책이 5만 부 가량 판매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흥미 위주의 상업영화들이 대부분 스크린을 점유하는 한국 영화 시장에서 ‘진지한 영화’가 틈새에 끼어 선전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동주’는 일종의 전기(傳記) 영화(biography film)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런 영화에서는 대개 과거 격변하는 시대를 살았던 인물의 험난했던 생애가 묘사되면서 그 시대의 정치사회 상황과 인간으로서 주인공의 개인적 삶이 조명된다. 이런 종류의 좋은 영화들이 많이 있었는데, 실례로 ‘말콤 X’, ‘마이클 콜린스’, ‘로자 룩셈부르크’ 등이다. 이들은 각기 독자적인 서술방식을 통해 당시 역사와 인물을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게 하며, 감동이거나 역사의 교훈 혹은 정치사회 비판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 ‘동주’를 돌아볼 때, 몇 가지 주목해 볼 포인트가 있다. 우선 이준익 감독은 제목이 된 주인공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윤동주의 동반자 같았던 고종사촌이자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송몽규에게도 거의 동등한 시선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는 실제로 ‘동주와 몽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감독은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송몽규의 정치적 행동을 함께 보여준다.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송몽규

실제로 동주와 몽규는 동갑 나이에 서로 같은 학교를 다닌 적도 많고, 함께 일본 유학을 갔다가 교토(京都)에서 체포돼 같이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비슷한 시기에 처형당했으니,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 진행되는 데 무리가 없다. 

조용한 성품의 시인 윤동주와, 민족정신이 투철해 독립투쟁에 대해 적극적인 생각을 지닌 송몽규의 정치적 행동주의자(activist)다운 성격이 대비되면서 영화는 진행된다. 내성적인 동주의 외로움과 고뇌가 배어 있는 시가 아름다운 기타 소리와 함께 내레이션으로 읽혀지다가도, 몽규의 활달한 성격과 적극적인 정치행동이 나타나며 극에는 긴장감이 흐르기도 한다. 

이들은 생각이 매우 다르면서도 우리의 옛 선배들처럼 서로에게 따뜻한 이해와 배려를 잊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민족을 구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과 금지된 민족어로 시를 쓰는 것은 서로 배치되는 행동이 아니라는 화해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영화 중간,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는 이들의 논쟁에서 말해진다. 문학은 행동이 결여되고 나약한 비참여주의자들의 도피처만은 아니라고. 

사실, 동주는 1943년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재학 중 ‘조선어로 글을 썼다’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넌지시 정치와 예술의 화해를 말하는 듯하다. 한국에서 격변의 198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낸 한 사람으로서. 

이제 영화의 전개방식에 대해 말해보자. 영화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회상(flash back) 방식으로 전개된다. 형무소에 수감된 동주는 일본 형사(조사관)의 취조를 받으며 수시로 생체실험 대상이 된다.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검사를 받는다. 이런 장면들 다음에 동주와 몽규가 살던 공간인 북간도의 용정 명동촌부터 경성-교토-도쿄-교토 시절이 차례대로 전개된다. 이렇게 영화는 형무소 장면들(A)과 동주-몽규의 인생여정 장면들(B)을 평행적으로 배열하여 A+B 장면들이 교차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교차 진행은 전체 영화 전개에 유익했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결말을 아는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 한국인 관객은, 형무소의 너무나 무겁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짓눌려 이후의 장면들을 안심하고 볼 여유가 많이 사라지게 된다. 물론, 이것이 그 시대를 묘사하는 감독의 의도이겠지만, 필자 생각에 형무소 장면은 마지막 부분으로 충분하지 않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으니, 과정을 더 알고 싶기 때문이다. 

형무소에서의 불필요한 역사 논쟁

그러기에 형무소에서 일본 형사와 동주의 역사 논쟁도 불필요해 보인다. 그런 자리에서 대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론에 대해 정당성을 논하고 반박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동주는 일본 군국주의에 희생됐고, 또 처형 2년 후에 사면을 받았는데, 이 무슨 괴상한 법인지, 이해할 수 없는 시대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논쟁이 필요할까? 혹시 감독이 이런 장면을 통해 관객에게(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역사교육을 하거나 역사적 교훈을 주려고 했다면 그건 감독의 과도한 역사의식이다. 

그래도 감독은 무거운 진행 속에서, 또 이렇다 할 로맨스가 없이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문학청년을 다루는 데서 무미건조함을 피하기 위해 아주 참한 여학생 두 명을 등장시켰다. 경성에는 동주의 시에 대한 이해와 동주에 대해 애정도 있는 이화여전 학생 이여진이 있고, 도쿄에는 동주의 시를 일본어에서 영어로 번역해 영국 출판사를 통한 출간마저 주선하는 릿쿄대학의 여학생 쿠미가 있다. 

영화 ‘동주’는 5억 원이란 아주 적은 예산을 갖고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제한된 촬영 장소와 소재의 제한이 있지만, 급히 제작된 듯한 조급함만 없었다면 이 영화는 다른 영화 제작자와 젊은 감독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던져주는 장점이 있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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