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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전시- '무진기행'전] "이상향은 상상 아니라 나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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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13호 김연수⁄ 2016.12.09 13:51:37

▲조송, '지금까지 모든 건 그저 허상이다'. 장지에 먹, 혼합재료, 95 x 131cm. 2008.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시종일관 섬세하고 예민해 보이기까지 하는 문체로 상상의 장소 ‘무진’의 풍경과 주인공의 심리를 은유하던 김승옥의 1964년 작품 ‘무진기행’은 돌연 소설 밖 세상으로 빠져 나온 듯 이렇게도 단순한 문장으로 마무리 된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이란 ‘부끄러움’이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다양한 감정-사고 작용을 함의하고 있다. 

소설의 표현에 따르면 눈앞에 청량한 바다가 바로 펼쳐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할 평야가 있는 농촌도 아닌 무진은 주인공의 세상 속에서 과거, 안개, 그리고 사랑을 느끼는 여인 하인숙으로 대변된다. 딱히 즐겁게 느껴지지 않는 주인공의 무진에 대한 과거의 기억은 안개와 하인숙으로 희석되며, 붙잡고 싶은 것, 곧 이상이 되어버린다. 주인공이 느꼈던 부끄러움을 무엇일까. 이상을 좇았던 것? 아니면, 현실 세계에서 가려놨던 자신의 욕망을 봤다는 것?

다양한 욕망만큼 다른 이상향

‘무진기행’이라는 소설과 동일한 제목으로 열리고 있는 전시는 젊은 한국화가 14명(강성은, 권순영, 기민정, 김민주, 김정욱, 김정향, 서민정, 신하순, 양유연, 이은실, 이진주, 임태규, 조송, 최은혜)의 이상을 모아놓고 있다. 김승옥의 소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대 사회에서 이상을 드러내는 것은 전통적 개념의 이상이 아닌 사회적 영향권 안에 속해 있는 개인, 혹은 가려진 개인의 욕망을 반추할 수 있는 거울 같은 행위가 될 수 있다. 

미술관 1층서부터 맞이하는 작품은 전형적으로 알고 있는 한국화의 외형으로부터 한참 멀어진 임태규의 작품이다. 전시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8m 대작의 제목 ‘에레혼(EREHWON)’은 19세기 영국 작가 사무엘 버틀러의 동명 소설에서 차용한 것이다. 거꾸로 읽으면 단어 ‘NOWHERE(어느 곳에도 없는)’가 되는 에레혼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이상향)’의 개념을 뒤집어 놓는 것이기도 하다. 

카툰 캐릭터처럼 머리와 눈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표현된 인물들은 전형적으로 표현된 커다란 집의 안과 밖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 공간 안에서 현실적 상징처럼 보이는 것은 집의 형상뿐이다. 인물들은 비행기나 용을 타거나 갖가지 방식으로 놀고 있으며, 인어공주 같은 동화 속 캐릭터로 변신한 모습도 보인다. 밝고 선명한 색채가 그림 전체를 덮고 있는 가운데, 색이 칠해지지 않은 곳은 인체뿐이다. 영어로 자만심이 많은 사람을 ‘big headed(큰 머리를 가진)’라고 한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색이 없는 사람과 색이 충만한 외부 세계의 대비는 밝고 명랑하게만 보이는 그림이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이상향의 역설을 희화화 하며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임태규, 'EREHWON(에레혼)'. 한지에 먹, 채색, 346 x 828cm. 2009.


작가 조송이 화폭에 펼친 세계는 어두운 정글 숲속 같은 모습이다. 원시림으로 스며든 달빛은 어둠과 맞물려 구불구불 흐르며 숲을 지나는 물결과, 물결을 따라 굴곡을 만들어 내는 이끼 풀들을 비춘다, 그 흐름들 속 군데군데 버려지듯 섞여있는 것은 버려진 한 시대의 유물처럼 보이는 태아의 형상과 부서진 인간들 그리고 동물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는 형상들이다. 부서진 동상의 질감처럼 표현돼 있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들이 구분되어 표현되지 않은 것들로부터 거대하고도 필연적인 시스템 안에서 특별할 것 없는 인간이 느껴진다. 단편적으로는 모든 인류가 멸망하고 난 뒤, 다시 원시림으로 돌아간 아주 먼 미래의 모습, 혹은 한 시대를 호령했을 어느 민족의 현재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가 작가 노트를 통해 밝힌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알 수 없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위협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 속에서 모두들 저마다의 사연을 외치고 있지만, 각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 하나 개개인의 슬픔을 알아주지 못한다’는 말에서 어찌됐든 한 세계의 마감 전까지 인간을 쫓아다니는 고독은 필연적인 것이자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조송, '한때 인간이 꾸몄었던 정원'. 장지에 먹, 혼합재료, 193 x 132cm. 2014.


내 안에, 혹은 곁에 있거나 변화하는 이상향

작가 김민주는 먹선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교한 세필로 화면을 채웠다. 매끈한 현대적 건물의 옥상과 유리창 속으로 보이는 폭포의 모습은 네모 건물 안에서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이 살지만 항상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또한, 생략 없이 하나하나 표현된 이파리들이 만들어낸 숲은 끊임없이 반복하며 그리는 행위 자체가 만다라화 같이 수행적인 제작 과정처럼 현실과 이상의 중립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숲을 그린 까닭’이라는 제목에 비춰, 작가가 그려낸 세계는 말 그대로 이상향, 즉 현실에서는 상상만 가능한 장소일 수도 있지만, 숲 속 작은 시내의 물결에 머리카락을 내맡긴 여인의 모습, 주렁주렁 매달린 과일을 수확하는 자연 속 조그만 여인들의 모습은 꽤 많은 대리만족과 휴식을 전달한다. 

▲김민주, '숲을 그린 까닭'. 장지에 먹, 채색, 135.5 x 196.5cm. 2014.


신하순의 그림 역시 자연 속의 휴식을 담고 있지만, 그의 그림은 정반대의 과감한 필체가 돋보인다. 잘 그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화면을 씩씩하게 채워나간 초등학생의 그림일기처럼 표현된 작품은 자체로 편안함이 느껴진다. 일상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떠난 휴가지의 풍경은 현실에서 만난 무릉도원이 아닐 수 없다. 

▲신하순, '아침 산책'. 장지에 수묵담채, 130 x 162cm. 2006.


한편, 옛사람들의 상상에서 대표적인 이상향의 장소는 달이었다. 눈으로는 볼 수 있지만 갈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달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을 펼쳤다. 그리고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현재의 달은 그저 분화구로 가득 차 있는 사막일 뿐인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됐다. 작가 양유연의 작품에서 ‘알게 되기 전의 이상’이 ‘알고 난 후 현실’이 돼버린 달은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은유하는 매체로 읽힌다.

그가 표현하는 달은 밝고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아닌 분화구가 부각된, 즉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질감이 강조된 물건에 가깝다. 금방이라도 무겁게 떨어질 듯한 달의 밑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철탑이나 오래돼 보이는 도시의 건축물들이다. 작가는 “달이라는 이상의 은유는 현실에 대한 피난처를 제공함과 동시에 현실을 더욱 고단하게 만들기도 한다”며, "달이 가진 따뜻하면서도 얼음처럼 차가운 속성은 현시대 이상향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전한다. 

전시는 서울 사간동의 금호미술관에서 내년 2월 12일까지 열린다. 

▲양유연, '철탑'. 종이에 아크릴, 93 x 66cm.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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