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8호 김금영⁄ 2018.10.01 16:05:33
남화연, 호추니엔, 고이즈미 메이로, 다이첸리안, 로이스 응까지 아시아에서 장르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활동을 펼쳐 온 예술가 5명이 국립현대미술관에 모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지난해에 이어 다원예술에 주목하는 ‘2018 다원예술: 아시아 포커스’(이하 아시아 포커스)를 MMCA서울 멀티프로젝트홀, 6, 7전시실에서 10월 3일까지 선보인다.
이번 프로젝트의 감독을 맡은 김성희 교수(前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초대감독, 現 계원예술대 교수)는 현 시대가 다원예술을 바라보는 경향을 짚었다. 그는 “동시대 예술은 다원예술을 어떤 장르로 접근하기보다는 예술이 지닌 가장 큰 특징으로서 바라본다. 특히 19세기 과거 예술이 회화나 설치, 조각 중심으로 이야기됐다면 20~21세기에 오면서 영상, 퍼포먼스 등 예술을 표현하는 훨씬 많은 매체가 생겨나면서 예술계는 이를 담을 새로운 그릇의 필요성을 느꼈다”며 “19세기 예술을 19세기 그릇에 담았다면, 21세기 예술은 21세기 그릇에 담아야 하는 이치”라고 설명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장르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는 국제 동시대 예술 경향을 국내에 소개하고, 아시아의 다원예술 작가를 지원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다원예술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해 왔다. 김 예술감독은 “다행히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조류에 발맞춰 미술관에서 다원예술 프로그램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다. 특히 아시아 포커스는 아시아에서 작가들이 신작을 만들고 이를 세계에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플랫폼”이라고 소개했다.
아시아 포커스는 이름 자체에도 들어있듯 특히 아시아의 다원예술 작가들에 주목했다. 왜 아시아 작가들이었을까? 김 예술감독은 “대체로 지금까지는 유럽에서 아시아의 예술 담론을 만들어냈고, 그들에 의해 아시아 예술이 쓰였다. 아시아가 아시아 자체를 쳐다보고 담론을 만들어낸 적은 없는 것 같다”며 “또한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외국으로 예술 콘텐츠를 수출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지만 실제로 제작 인프라가 전무한 현실이었다. 아시아 포커스는 이런 맥락을 타개하기 위해 아시아 작가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아시아 포커스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신작을 위촉하고 제작하는 방식을 취한다. 특히 다원예술의 제작비를 효율적으로 분담하고 제작된 작품을 전 세계에 효과적으로 유통하기 위해 공동제작 시스템을 도입했다.
지난해 아시아 포커스에서 제작된 김지선 작가의 ‘딥 프레젠트’는 벨기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의 3개 기관과 함께 제작비를 분담해 만들어졌고, 올해 5월 해당 기관에서 순회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바 있다. 올해 아시아 포커스가 선보이는 5편의 작품 역시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 아트, 중국 밍현대미술관, 싱가포르 국제예술 페스티벌, 독일 캄프나겔 극장, 벨기에 쿤스텐페스티벌 등 총 10개의 해외 기관과 공동 제작됐다.
마약왕 올리브 양부터 삼중 스파이,
작가 자신의 내면 이야기까지
올해 아시아 포커스의 주역은 남화연(한국), 로이스 응(홍콩), 고이즈미 메이로(일본), 다이첸리안(중국), 호추니엔(싱가포르)이다. 호추니엔의 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세계 초연으로 구성됐다. 다섯 작품들은 아시아의 역사를 살핌과 동시에 현재의 우리의 모습까지 고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먼저 로이스 응의 아편 박물관 3부작 중 1부 ‘쇼와의 유령’이 ‘2017 다원예술: 아시아 포커스’에서 소개된 데 이어 2부 ‘조미아의 여왕’이 올해 아시아 포커스를 찾았다. 20세기 동남아시아의 무정부주의자들의 수장이자 아편 유통망을 장악했던 마약 왕인 올리브 양이 피라미드 속 홀로그램으로 등장해 민족과 국가 정체성이 얽혔던 동남아시아의 미로 같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로이스 응은 “2차 대전 당시 버마, 코캉, 중국 국경 지대에 형성됐던 무정부주의 삼각지대 ‘조미아’의 수장이자, 동남아시아의 아편 유통망을 장악한 마약 왕,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지 않았던 유령 같은 올리브 양을 통해 아시아의 근대사를 읽으며 오늘을 반추한다”고 밝혔다.
남화연은 ‘궤도 연구’를 통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핼리 혜성의 움직임과 시간을 지금 이 순간 감각해보려는 퍼포먼스 공연을 펼쳤다. 남화연은 “1986년 핼리 혜성이 지구에서 보였고, 2061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지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핼리 혜성은 어딘가에서 운동하고 있다”며 “관련 기록들을 조사하면서 이 혜성의 궤도에 대한 해석이 바뀌어 온 흔적을 발견했다. 궤도를 해석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쭉 살피면서 우주적 차원의 움직임을 퍼포먼스로 옮기려는, 어찌 보면 불가능한 것을 구현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 또한 인간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고 밝혔다.
고이즈미 메이로는 VR 신작 ‘희생’을 선보인다. 이라크 전쟁을 경험한 한 남자의 시각을 VR기술로 담아내며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작품이다. 고이즈미 메이로는 “이라크에서 전쟁의 참상을 겪은 젊은이에게 헬멧을 씌우고 카메라를 장착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화면에서 이 사람의 시점으로 현상을 바라보게 된다”며 “내 몸은 개인의 것이지만, 이 신체가 전쟁터 등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뤄지는 방식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이 간극을 VR기술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호추니엔의 공연 ‘의문의 라이텍’은 8월 독일 캄프나겔 극장에서 초연된 데 이어 이번 ‘아시아 포커스’에서 두 번째로 공개됐다. 1939~1946년 말레이 공산당 총서기를 지낸 라이텍에 관한 작품이다. 호추니엔은 “프랑스, 영국, 일본 군의 삼중 스파이였음이 밝혀진 라이텍의 초상을 통해 탈식민화, 근대화 과정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야 했던 동남아시아의 모습을 살펴보고 싶었다”며 “특히 20세기는 종종 배반의 세기라고 이야기된다. 국경의 생성과 관련해 ‘분리’의 개념이 도출됐고 한국 분들도 이 개념에 낯설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라이텍이라는 인물을 통해 배신, 배반이 흑백논리 아래 이야기될 수 있는지 여러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퍼포먼스 아티스트 다이첸리안은 ‘동에서 온 보랏빛 상서로운 구름, 함곡관에 가득하네’를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로 아시아를 이야기한다. 당나라 시대의 귀신 이야기 ‘유양잡조’를 그림자놀이처럼 아날로그적인 형식으로 풀어낸다. 다이첸리안은 “논리와 비논리, 이성과 비이성,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라고 밝혔다.
한편 아시아 포커스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 공연 후 해당 기관에서 순회 공연이 예정됐다. 김 예술감독은 “각각의 작품들도 중요하지만, 또 중요한 건 작품을 알리기 위한 시스템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널리 쓰이는 제작 방식으로서, 여러 기관들이 한 작가의 작품을 공동으로 만들고, 또 각 기관들이 그 작품을 보여주는 공동 제작 방식을 우리도 취했다”며 “아시아 포커스는 한국에서가 끝이 아니라 전 세계에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주기 위한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으로 아시아의 공연예술 제작유통의 중심 플랫폼으로 기능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