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관동팔경을 끝맺고 그림 길은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남으로 내려간다. 이제는 우리에게 낯선 땅, 옛 청하현(淸河縣) 지역이다. 지금은 포항시 청하면이 되었다. 겸재는 이곳 청하현에서 1733년(영조 9년) 6월부터 어머님이 돌아가신 1735년(영조 11년) 5월 사직할 때까지 2년 남짓 현감 생활을 하였다. 작고 조용한 지역이라 격무에 쫓길 일 없던 겸재는 이 기간 동안 삼척부사로 있던 사천(槎川)과 함께 동해안 명승을 다니며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고, 자신의 관할구역인 청하(淸河)를 대상으로 한 그림도 4점이 전해진다. 청하의 명승 내연산(內延山)을 그린 그림이 3점, 청하현 읍성(邑城)을 그린 1점이 그것이다. 이번에 찾아가는 겸재의 그림 길은 내연산 길이다.
청하현 읍지(淸河縣 邑誌) 산천조를 보면 “내연산(內延山)은 현(縣: 읍치)으로부터 북 11리에 있다. 신라 진평왕이 견훤의 난에 이 산으로 피신했다(自縣北十一里 新羅眞平王避甄萱亂于此山)”라 하였다. 또 신귀산(神龜山)이 나오는데 “현 북 11리에 있다. 주맥은 응봉산으로부터 온다. 삼용추(三龍湫)가 있으며 가뭄에 기도하면 응답이 있다(新龜山 在縣北十一里 主脈自鷹峰山來 有三龍湫旱禱則應)”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같은 이야기가 기록돼 있으며 보경사 원진국사비문에도 산 이름을 신귀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옛사람들의 산천관은 낙동정맥(洛東正脈)의 한 줄기가 울진 응봉산으로 뻗어 나오면서 그 맥이 신귀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내연산으로 부르는 산의 보경사 지역 산과 계곡은 달리 신귀산으로 불렸던 것이다.
‘세 용의 폭포’와 조선 보리
이제 겸재 그림의 삼용추를 찾아 내연산으로 향한다. 차로 향할 때는 간단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구룡포에서 보경사행 버스(200번, 500번)를 이용하든가, 청하면을 들러 오려면 지선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보경사 매표소를 지나면 우측에 천년고찰 보경사(寶鏡寺)가 있다. 12폭포 청하골 계곡 길을 거쳐 내연산(삼지봉)까지 다녀오려면 먼 길이라 보경사를 나중에 들리기로 하고 계곡 길을 따라간다. 보경사 건너로 고즈넉한 암자 서운암이 보인다. 이곳도 하산 후 여유 보아 들리기로 하는데 길옆 숲에는 한흑구(韓黑鷗) 선생의 문학비가 서 있다. 우리 어렸을 때 중학교 교과서에 선생의 수필 ‘보리’가 실렸었다. 얼마나 신선했던지…. 선생이 이곳 수산대학에 계셨기에 이런 비를 세웠나 보구나. 잠시 다가가서 비를 보니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수필의 한 문장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어쩝니까? 이 땅의 보리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군요.
계곡물은 천하의 명승답게 협곡 사이로 이어진다. 가뭄에도 항상 일정량의 수량을 유지하는 큰 계곡이다. 13킬로쯤 되는 물길을 따라 12폭포가 위용을 자랑하는 곳이다. 산도 우뚝하여 저 끝은 향로봉(930m)으로부터 내연산(삼지봉 710m), 문수봉(672m)으로 이어지는 명승이다. 하루에 모두 지나고 오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길이라서 겸재의 삼용추 포함 8개의 폭포를 만난 후 내연산(삼지봉)을 돌아 내려오리라.
트레킹 수준으로 하실 분은 겸재의 삼용추의 배경이 된 연산폭포까지 7 폭포만 감상 후 돌아오는 코스가 적절하고, 조금 더 체력이 되는 분은 선일대와 학소대 전망대까지 포함하여 들러 오는 코스가 적당하리라. 이 정도 코스도 북한산 정상까지 다녀오는 수준의 산길은 될 것이니 체력 안배가 필요하다.
청하골 계곡 길은 예부터 사람의 발길이 그치지 않은 곳이라서 돌길을 잘 다듬어 놓았다. 폭포는 상생폭포, 보현폭포, 삼보폭포, 잠룡폭포, 무풍폭포, 관음폭포, 연산폭포, 은폭포, 복호폭포 1-2-3, 시명폭포까지 12폭포가 이어진다. 치솟아 오른 바위 절벽도 선일대, 비하대, 학소대를 위시하여 줄줄이 계곡을 에워싼다. 우리 땅에서 가히 볼만한 폭포를 가장 많이 보려는 이에게 내연산만 한 곳이 또 있을까?
계곡 길 옆으로는 내연산과 아랫마을을 지켜 주시던 산신님의 신위(神位)를 새로 모셔 세워 놓았다. 내연산 산왕대신지위(內延山 山王大神之位), 고모당신지위(故母堂神之位).
고모당신은 보경사에 계시던 보살인데 호랑이에게 물려가 여자 산신이 되었다 한다. 이제는 많은 탐방객들 발길 지켜 주시는 산 할아버지, 산 할머니의 모습이리라. 오르는 길 네 번째 폭포 잠룡폭포는 탐방로에서 안쪽 은밀한 곳으로 떨어지는데 영화 남부군에서 물 멱감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라 한다.
고관대작의 이름자 속 수줍은 달섬이
그 위는 무풍폭포(無風瀑布), 관음폭포(觀音瀑布), 연산폭포(延山瀑布)다. 겸재의 내연삼용추(內延三龍湫)의 대상이 되는 세 폭포가 바로 이 폭포들이다. 겸재는 내연삼용추도 2점을 남기고 있다. 리움 소장 대작 내연삼용추도와 국박(國博,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내연삼용추도가 그것인데 이 두 그림은 공히 이 세 폭포를 한 폭에 담고 있다. 이 세 폭포는 어느 시점(視點)에서 보아도 한 눈에 들어올 수 없는 위치인데, 예의 ‘드론으로 촬영한 시점(俯瞰法)’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렸다.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는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겸재는 마음의 눈으로 폭포를 위치 이동시켜 한 폭에 담았다. 그 결과 최고의 삼용추도가 탄생한 것이었다.
이제 리움 소장 삼용추도로 이들 세 폭포를 살펴보자. 필자가 편의상 숫자를 부여했는데 1은 무풍폭포다. 그림과는 달리 규모가 작아 무풍계(無風溪)라 한다는데 가파른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에 탐방로 옆에서는 전체 모양을 보기 어렵다. 이어지는 2번 폭포는 관음폭포로 12 폭포 중 가장 신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떨어지는 물기둥 옆으로 지질변동이 만들어낸 세 개의 굴이 있다. 관음굴이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수도승이 있었다 한다. 그 앞 맑은 폭포수가 고인 소(沼)는 감로담(甘露潭)이라 한다. 주변은 너럭바위와 고운 모래가 쌓여 있어 예나 지금이나 이 폭포에 오는 이들이 여기에서 잠시라도 머물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주변 바위에는 위 연산폭포 주변과 함께 이곳을 다녀간 무수히 많은 이들의 이름자가 각자로 남았다. 당연히 경상관찰사(11인)를 비롯하여 주변 군수, 현령들의 이름이 남았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지낸 이들을 위시하여 이곳을 다녀간 유명인사들도 이름을 남겼다. 이곳 각자를 연구한 지역연구가에 의하면 확인하기 어려운 이름자만도 400여 인이라 하니 조선 중후기는 명승탐방 각자(刻字)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 각자 중 필자의 마음을 흔든 각자(刻字)가 있다. 곡강 수령 이광석(李光錫), 조천 수령 김성익(金星翼) 각자가 있는 바위에 이광정(李光正) 옆에 조그맣게 숨어 있는 각자(刻字)가 있다. 경기달섬(慶妓 達蟾)이다. 경상도 기생 달섬이거나 경주 기생 달섬이라는 말이다. 이광정은 경상관찰사였다는데 이광정이 관음폭포에 놀러 왔을 때 데리고 온 기녀의 이름을 나란히 새긴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잠시 한 눈 한 번 팔자. 조선의 풍류남아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는 서도병마사로 부임해 가는 길에 황진이 무덤 앞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지어 바쳤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난이
잔(盞) 자바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이것이 허물이 되어 그는 파직을 당했다 하니 조선에서 벼슬길에 나선 이가 자신의 이름 옆에 기생의 이름을 오래오래 남길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찌 된 것일까? 우선 달섬(達蟾)이라는 이름을 보자. 예전 중국 달 전설에, 항아가 달로 도망갔다는 항아분월(嫦娥奔月) 신화가 있다.
전설적인 궁수 예(羿)와 그의 아내 항아는 하늘나라에서 죄를 지어 인간 세상으로 쫓겨왔다. 어느 날 남편 예는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불사약을 받아 왔는데 항아는 이것을 먹고 몸이 붕 떠서 달에 가게 되었다 한다. 혼자 불사약을 먹고 달로 간 죄가 적지 않아 두꺼비의 형태로 변했는데 그렇지만 항아는 점점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 달의 요정이 되었다.
기생 달섬(達蟾). 여기에서 달(達)은 음을 한자로 빌린 차음(借音)으로 달의 두꺼비(月蟾), 곧 달의 요정(妖精)이란 말일 것이다. 달섬이는 비록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달의 요정으로 살고자 한 그 시대 요정이었다. 어떤 여인이었을까? 관찰사를 수행해 왔다면 석수에게 넌지시 품삯 좀 쥐여 주고 자신의 이름도 새겨 달라 했을 것이며, 그보다는 어찌 명승을 세도 부리는 남자들만 간단 말이냐? 어느 꽃 피는 날 향단이와 집안일 보는 삼돌이에게 음식 지고 술도 한 단지 지게 하여 동무 몇 명 어울려 다녀갔던 것은 아닐까? 이름자 너무 크게 쓰면 외람되니 구석에 숨은 듯이 남긴 것은 아닐까?
보일 듯 말 듯 새겨진 겸재의 이름자
그림으로 다시 돌아와서, 감로담 옆 너럭바위에는 선비 몇과 사동을 그려 넣었다. 저 선비 중에는 관아재 조영석이 화제(畵題)를 달았듯이 이 그림을 와유(臥遊)할 이거용(李居庸) 일행을 미리 그림 속에 그려 넣었을 것 같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요즈음은 연산구름다리가 놓여 다리로 건너가는 연산폭포이지만 그때는 아슬아슬 오르내리던 사다리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제 사다리를 오르자(우리는 다리를 건너자). 또 하나의 비경 연산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지난해에 왔을 때에는 울타리로 막아 놓아 들어올 수가 없었는데 울타리를 제거하니 관람이 편해졌다.
이 폭포 주변에도 무수히 많은 이름자들이 있다. 개울 너머로 ‘延山瀑 郡守 李鍾國(연산폭 군수 이종국)’이라는 각자가 보인다. 이 군수가 명명한 것인지, 아니면 있는 이름을 확인해서 새겼는지는 모르지만 이 폭포의 이름이 연산폭포인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많은 이름 각자 중에서 은밀한 곳에 보일 듯 말 듯 새긴 이름자가 있다.
“鄭敾 甲寅秋(정선 갑인추)”
몇 해 전 이 이름을 찾으러 왔다가 한나절을 고생해서 찾은 일이 새삼스럽다.
청하현감 시절 1734년 갑인년 가을 겸재가 이곳에 와서 부끄러운 듯 남기고 간 이름자이다. 각자는 웅덩이 넘어 아슬아슬한 위치에 수직으로 새겨져 있다. 아마 내연삼용추를 이때 스케치했을 것이다. 필자가 사진에 위치를 표시했으니 연산폭포에 가시면 찾아 보십시오. 관할구역의 최고위자로서 얼마든지 크고 깊게 이름자를 새길 수 있었을텐데 지금도 맨눈으로는 보기 힘들어 물을 뿌리고서야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새긴 겸재를 생각하면 그림뿐 아니라 그 사람됨이 마음에 오는 날이다.
불국토 이뤘던 내연산
이제 물길을 버리고 산을 보자. 4는 비하대(飛下臺)이다. 그 위에 있는 집은 계조암이라 한다. 이제는 터만 남았다. 1754년(영조 30년) 3월 월영대(속칭 妓下臺)에 오른 3인이 있었다. 영일현감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흥해 시인 진사 최천익, 보경사 승려 오암이었다. 이들은 계조암에서 논어를 논하고 월영대로 나왔다. 이때 이상정이 월영대(속칭 기생이 떨어졌다 해서 기하대)를 비하대(飛下臺)로 바꾸었다 한다. 지금도 이곳을 비하대라 부르니 그 효과는 오래 간다. 65년 뒤 이상정의 손자 이병원이 청하 현감으로 왔는데 할아버지가 비하대로 이름을 고쳤음을 알고 각자로 남겼다.
飛下臺 大山 李先生 命名(비하대 대산 이선생 명명).
내연산을 연구한 이들에 의하면 비하(飛下)라는 단어는 송나라 주희의 시구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주자학에 경도되었던 조선, 특히 중후기 지도층의 한계에 새삼 갑갑해진다. 주자가 중국 오악 중 남악 형산(衡山)에서 지은 시가
‘취하여 축융봉에서 내려오며 짓다(醉下祝融峯作)’라는데,
내가 만 리 먼 곳에 와서 큰 바람을 타니 깊은 계곡과 층층 구름이 가슴을 씻어 주네. 석 잔 술에 호기가 일어 낭랑히 시 읊조리며 날듯이 축융봉에서 내려오네.(我來萬里駕長風, 絶壑層雲許盪胸. 濁酒三杯豪氣發, 朗吟飛下祝融峯).
비하대 좌측 산 5는 선일대(仙逸臺). 일명 선열봉, 운주봉, 백운대 등으로 불렸고 원래 이름은 선열대(禪悅臺)였다 한다. 지금도 운주암, 백운암 두 절터의 축대와 기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그날을 말하고 있다. 내연산은 불국토였던 모양이다. 청성집 유내연산기(靑城集 遊內延山記)에는 ‘옛날에 암자가 53개 있었다 하더라(云舊有五十三菴)’ 했으니 몇 개 남은 절이 그나마 옛 내연산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또 하나의 내연삼용추도는 국박(國博) 소장본이다. 그림을 그린 대상은 세 폭포와 그 위 산들인데 시각이 넓어져 좌측의 선일대도 더 많이 보이고, 우측의 학소대(鶴巢臺)도 조금 보이게 그려 넣었다. 비하대 위 계조암은 역시나 선명하고 그림 우측으로는 학소대 앞으로 내연산 깊숙이 들어가는 길이 선명하다. 그런데 이 그림은 리움 소장본 삼용추의 일필휘지 시원한 붓놀림과는 달리 세밀하고 쫀쫀하게 그린 그림이다. 서울대 ㅈ교수(고고미술사학과)는 논문(‘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방식’)에서 두 그림의 수준 차이를 지적한 바 있다.
또 하나 겸재의 내연산 관련 그림은 국박 소장본 고사의송관란도(高士倚松觀瀾圖, 전에는 憮松觀瀑圖라 불렀음)이다. 이 그림은 화원들이 미술 입문 할 때 쓰는 연습용 화보집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속 그림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겸재는 이미 이 도판을 연상케 하는 그림 무송관산(撫松觀山)을 그린 바 있는데, 고사의송관란도(高士倚松觀瀾圖)는 산 대신 물을 바라보는 것만 다를 뿐 동일한 구도의 그림이다. 진경산수보다는 사의산수(寫意山水)라 해야 할 것 같다. 다만 화제(畵題)가 ‘삼용추 폭포 아래 유연히 남산을 보네(三龍湫瀑下 悠然見南山)’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림의 배경은 내연산이다.
겸재의 그림 말고도 작가 미상의 간송 소장 ‘내연산 폭포’가 있으며, 일본에 가 있는 작가 미상 내연산 그림도 있다고 한다.
이제 다시 청하골 계곡을 오른다. 잠시 후 나타나는 것은 8번째 폭포 은폭포(隱瀑布)다. 깊숙이 가려진 곳에서 물이 내리니 여자의 음부를 떠올려 음폭포(陰瀑布)라 부르다가 지금의 은폭포(隱瀑布)가 되었다 한다. 이제 내연산을 오르기 위해 우향우 능선길로 접어든다. 주위에는 옛 화전민들이 살던 집터며 밭터가 여기저기 보인다. 이렇게 오르면 어느덧 내연산 삼지봉(710m)에 닿는다.
이 산줄기의 최고봉 향로봉(930m)은 너무 멀기에 돌아서서 문수봉(672m), 문수암 지나 다시 청하골 계곡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내연산은 오래전부터 명승으로 소문이 나다 보니 많은 이들이 다녀갔고 이들의 문집에 시문으로 남았다. 아쉬운 대로 두 편만 읽고 가자.
비하대에서 만났던 대산 이상정의 시(詩)인데 내연산 대비암에서 읊었다. 이제는 대비암 그 터만 남았다.
대비암에 올라 운을 불러 ‘심’ 자를 얻다(上大悲庵呼韻得深字)
뜰 가득 소나무 회나무 그림자 지니 一庭松檜影陰陰
천 길 산마루의 절집은 깊고 千仞岡頭佛院深
꽃은 난만하고 산새는 지저귀는데 花事欲闌時鳥語
종일토록 유연히 무심으로 앉아 있네 悠然終日坐無心
다른 한 수는 조선 후기 문신 황경원의 강한집 속 ‘내연산에 들어가 폭포를 보고 짓다(入內延山觀瀑作)’라는 시다.
푸른 벽 30 길 靑壁三十仞
폭포는 유장하게 떨어지네 懸泉下冉冉
고운 눈기운은 빠르게 엉기고 艶雪氣還凝
은은한 무지개 다시 반짝이누나 隱虹光復閃
첫 못에는 단풍나무 무성하고 初潭紅樹重
가운데 폭포 흰 구름 피네 中瀑白雲渰
위 못은 아득히 깊고 깊고 上淵杳幽深
바위 골짝은 진실로 험준하구나 巖洞信天嶮
(뒤 8련은 줄임)
이곳을 떠나기 전 잠시 보경사에 들른다.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602년(진평왕 24)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大德) 지명(智明)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고찰이다.
적광전 앞 5층 탑에 뒤로 갈수록 지대가 높은 곳에 자리한 건물들로 인해 안정감이 있다. 뒷 언덕에는 보물 252 원진국사비와 보물 430호 사리탑이 있다. 원진국사 탑이 아닐까 추측할 뿐 주인공은 알지 못한다. 돌아나오는 천왕문 문설주에는 절을 지키는 목사자(木獅子)가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