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은 나의 벗이며 스승이다. 대자연의 일부나마 충실히 작품으로 그려낸다면 나의 일부를 발견하리라.” “나는 항상 내 마음으로 끝없이 우주를 여행함과 더불어 내 몸이 종잇조각과 같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내가 마음먹은 것들을 연필 끝을 빌려 흰 백지 위에 영원히 조각하여 후세에 전하리라.”(작가의 말 중에서) 연필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색감과 표현의 가능성을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끌어 올린 고 원석연(1922∼2003) 화백은 가히 연필화가라 불릴 만하다. 여느 색이 풍부한 재료들로도 표현이 어려운 소재들을 연필만으로 표현한 그의 작품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대상들을 관찰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그 대상을 보고 느낀 정신적 감흥까지도 얼마나 철저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특히, 가위나 도끼와 같은 철재들은 연필의 한계를 뛰어넘은 표현기법은 차지하더라고 가위와 도끼를 사용하던 당시 고단했던 삶의 파편들이 가슴으로 전해진다. 한낱 곤충에 불과한 개미를 통해 전쟁과 전쟁의 후유로 인해 파괴된 인간상들을, 나아가 인간 존재의 고독함을 표현하고 있다. 넓은 화면에 작은 개미 한 마리를 그려놓은 작품은 구도가 주는 긴장감뿐 아니라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보들 속에서 따라가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뒤쳐질 수도 없는 말 그대로 허우적거리고 있는 현재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연필이라는 재료적 한계를 극복하고 고집스럽게 연필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모색해 온 고 원 화백의 집념과 그 연필로 그려낸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자리가 6월 20일부터 7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에 마련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선보이는 원 화백의 풍경작품은 연필화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세잔의 한 곳의 풍경을 시간의 변화에 따라 빛의 다른 인상을 그려낸 것처럼 원 화백도 한 곳의 풍경을 연필의 운용 기법에 따라 전혀 다른 화풍들로 표현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의 풍경작품에서는 느낄 수는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봄의 따스한 바람도 느낄 수 있으며, 강약의 연필선으로 잔잔히 흐르는 물결도 거침없이 표현했다. 전시를 마련한 이동재 아트사이드 갤러리 대표는 “일반 작가의 개념보다는 자신이 지켜온 논조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던 작가로 기억된다”며 “작품에 담긴 소재가 말년의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낸 것처럼 인간 삶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은 작품이다”고 전시의 의미를 밝혔다. 원 화백은 화랑과 판매를 위한 가격 협상을 하지 않은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주한 미 공보관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 초상과 생가를 그려서 전시를 할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전시장을 찾아 그림을 구매할 정도로 그의 감각은 탁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원 화백은 대통령이 그림을 구입하고는 시간이 지나도 그림 값을 주지 않자 청와대를 찾아가 그림 값 내놓으라고 방문을 한 에피소드도 그의 강직함을 드러내는 일화 중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일생을 연필을 고집한 원 화백이 그 재료에 있어서는 외골수적인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바라본 시대는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하찮아 보이는 곤충에서부터 한국의 자연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까지 넓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과 같이 우리의 삶에 가장 밀접하고 때로는 지난한 삶으로 인해 놓치고 있는 순간순간 삶의 진지함들을 그 누구보다도 더 폭넓게 그려 왔다. 동시대를 반영, 사료적·문화적 가치 충분 따라서 그의 연필화는 당시의 시대를 바라보고 작가의 생각과 동시대의 감성들을 반영해온 한국 화단의 중요한 사료적, 문화적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원석연 화백은 15세에 건너간 일본 가와바타 화학교(川端畵學敎)를 다니며 그림 공부를 했으며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를 레오나르도 다빈치에서부터 이었다 회고했다.
또한 “누가 뭐래도 나는 연필 하나로 하나의 완성된 회화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회고에서도 드러나듯이 연필에서 자신이 추구해나갈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1940년대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가 주관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처음 개최되자 원석연도 작품 두 점을 출품했다. 그가 전 생애에 걸쳐 공모전에 작품을 내놓은 것은 1949년의 이 전람회가 유일하다. 연필로만 그린 초상 작품이 국전에서 입상한 경우는 아마 원석연이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 공보원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이후 1950년대 내내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그는 네 차례에 걸쳐 서울과 부산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각각의 개인전은 조금씩 그의 존재를 화단에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현실세계의 냉혹함을 뱀, 개미, 병아리, 닭 등의 사물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이런 방식은 그의 작품이 점차 짙은 서정성을 더해가는 가운데에도 변치 않는 기본 요소가 됐다. - 왕진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