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3호 왕진오⁄ 2013.07.01 11:05:50
표암의 초상화는 관모(烏紗帽)에 평상복을 입은 예법에 어긋나는 모습이다. 하지만 출사(出仕)와 은일(隱逸)을 동시에 지향하는 사대부의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초상화를 그리는 관행을 넘어선 문인화가로서의 당당한 기개를 보여준다. 화면에 스스로 “마음은 산림에 있으면서 조정에 이름이 올랐다”고 적었다. 조선시대 후기 문인화가인 표암 강세황(1713∼1792)탄생 3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 6월 25일부터 8월 2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에서 펼쳐진다.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 ‘18세기 예원의 총수’로 알려진 표암의 예술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회다. 표암 강세황은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문인화가이다. 개성 지역을 유람하고 제작한 '송도기행첩'의 화가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강세황이 살았던 조선 18세기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며 문예가 활짝 꽃피었던 시기다. 도시가 발달하고, 세상을 보는 눈과 생활 패턴이 빠르게 바뀌어 갔던 역동적인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은 서양 문물을 포함한 새로운 지식과 경험에 눈떴고 개성이 가득한 저술과 예술작품을 창출했다. ‘표암유고’ 등 집안에 대대로 전해 오는 유물들과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등 산수화, 초상화, 사군자화 등 대표 유물과 그가 글을 남긴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포함해 총 103점을 소개한다. 강현, 강세황, 강이오 초상 등 보물 6점도 있다.
표암은 단원 김홍도(1745~?)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선 시대 문인 화가다. 개성 지역을 유람하고 제작한 ‘송도기행첩’의 화가로 잘 알려졌기도 하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출세를 포기하고 32세 때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이사한 뒤 벼슬길에 올라 상경하게 되기까지 30년 동안을 살았다. 61세가 되던 1773년 뒤늦게 시작된 관직 생활에서 한성부 판윤(서울시장)까지 올랐다.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관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에 입소했으며, 중국 사행(使行)에 부사(副使) 자격으로 참여해 건륭제를 알현하는 등 말년에는 남부럽지 않은 출세길을 달렸다. 전시에서는 70세에 그린 자화상과 강세황 기로소 입소를 기념해 정조의 명으로 이명기(1757~?)가 그린 초상, 궁중화원 한종유(1737~?)가 그려준 초상 등을 보여준다. 특히 한종유가 부채에 그려준 강세황 61세 초상은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조선후기 대표 그림에 친필로 화평 표암의 일생을 담은 각종 자료도 나왔다. 진주강씨 문중에 전하는 강백년(1603~1681), 강현(1650~1733), 표암 관련 자료 특히 관직 임명 교지, 각종 필묵, 유고 등을 통해 일생을 펼쳐놨다. 안산에서 교유한 여러 문사, 화가와의 만남도 구성했다. 30대 초반부터 안산에서 30년간 살면서 처남 유경종(1714~1784)과 서화 감식안을 키우고 화가 허필(1709~1768)과 합벽첩을 제작했다.
그러한 교유관계는 ‘지상편도(池上篇圖)’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 등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지풍경을 그린 표암의 그림, 소재와 채색 구사에서 새로운 시도를 추구한 면모도 조명한다.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보여주는 강세황의 비평이 담겨 있는 조선시대 화가들의 작품들이 함께 소개된다.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등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많은 화가들의 그림에 강세황은 친필로 화평을 남겼다. 그는 직접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지만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 비평을 함으로써 자신만의 문예적 소양을 선보였다고 할 수 있다. 강세황이 남긴 화평은 감식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화평 한 줄 한 줄은 오늘날 조선시대 회화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적 근거가 됐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번 전시는 18세기 대표적인 문인화가 강세황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인다. 강세황이 역동적인 삶 속에서 평생 이어간 서화세계를 통해, 정조가 삼절(三絶)의 예술이라 칭송했던 그 예술의 정수를 느껴보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왕진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