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아티스트 - 허승희] 인간 그 쓸쓸함과 따뜻함에 대해
(CNB저널 = 왕진오 기자) 타인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위안을 느끼는 경험은 많은 사람들이 한다. 허승희 작가는 이런 간접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생각들을 화면에 담는다.
그동안 진행한 작업은 인물의 형태와 절제된 무채색을 통해 심리적 측면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주변에서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모습들이다. 인간이 지닌 우울하고 변덕스러운 감정을, 중첩된 표현으로 무게감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면에 등장한 오브제들은 구체적이거나 섬세하지 않은 몸짓이다. 그러나 인물과 배경을 통해 조화를 이룬다. 작가는 긁기, 씻어내기, 덜어내기, 다시 얹기 등 다양한 작업 방식을 통해 작품을 꿰뚫는 소통의 고리를 이어간다.
▲허승희, ‘기다림’. 캔버스 위에 아크릴, 24 x 33.5cm, 2015.
“캔버스 위에 물감을 두껍게 바른 다음, 긁어내고 씻어 내거나, 다시 그 위에 다른 색을 올려 인물의 형상이 배경에 조화롭게 스며들도록 작업을 합니다.”
허 작가는 이 같은 과정을 거쳐 관계에서 발생하는 피상성에 대한 허무함을 표현한다. 외부의 어떤 갈등이나 고민은 긴 성찰의 시간으로 우리를 안내하곤 한다. 즉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서로를 위로하고, 반성하게 하고,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는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주로 한 공간에 덩그러니 위치시킨 인물을 통해, 공간 안의 사유적 공간을 인물이 모두 차지하도록 배치한다.
▲허승희, ‘상실감’. 캔버스 위에 아크릴, 193.9 x 130.cm, 2015.
이는 상처를 덜 받기 위한 작가만의 독특한 작업 방식이다. 인간은 충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고 자신의 감정을 순화시켜야만 타인과의 소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관점이다.
허 작가는 “인간은 늘 행복을 추구하고 풍요로움을 지향하지만 가끔은 사색적인 시간과 혼자만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듯 합니다. 타자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저 역시 타자의 작품 속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시켜 보는 것 같습니다”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형태, 그리고 무채색 배경에 의존해 작업을 펼친 결과물이다. 감정의 절제와 표현의 단순성에 가까워지도록 부단한 붓질의 과정을 거친다. 이 모든 것은 작가가 지향하고 있는 작업의 궁극적 목표와 일치한다.
▲허승희, ‘걷고 있는 여자’. 캔버스 위에 아크릴, 112 x 145.5cm, 2015.
△두 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것 △웅크리는 것 △뒤돌아 눕는 것 △어딘가에 어깨를 기댄 모습 등 단순한 형태의 인간을 화면에 배치하는 방식은, 인간이 자신을 충분히 위로하기 위한 행위들이다. 또한 시간의 궤적이기도 하다.
허 작가의 작업은 자신을 환기하고 자신을 위로하는 시간이다. 어쩌면 타인의 그런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안의 것들을 들춰내는 것이 타인으로 향하는 내면의 용기 있는 첫 출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 인물을 통해 사유의 공간을 제공
허 작가에 대해 오상일 홍익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그가 선보이는 작품의 테마는 주로 인물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화면의 중심에 당당히 자리 잡고 응시하는 여느 인물화와 사뭇 다르다. 이들은 그림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화면의 일부인 양, 흐릿한 실루엣을 보이면서 한쪽 구석에 수줍게 자리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뒤돌아 서 있거나 옆모습만 조심스레 보여줄 뿐이다.
▲허승희, ‘am6’. 캔버스 위에 아크릴, 30cm × 30cm, 2015.
허 작가가 그려내는 인물은 마치 동양화에서처럼 배경의 여백과 경계를 나누지 않고, 함께 어울려 있다. 이때 인물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익명성과 모호성이다.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소년도 노인도 아닌, 단지 인간일 뿐이다.
보편적 인간의 실존을 이렇듯 보여준 이는 아마도 자코메티였을 것이다. 공간 속에 단지 정체불명의 한 줄기 선으로 표현된 자코메티의 인물상처럼 허승희의 인물도 화면 속에 침잠하여 배경 속으로 숨어들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익명성이 보편자로서의 인간의 실존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역설을 낳는다.
▲허승희, ‘책 읽는 남자’. 캔버스 위에 아크릴, 72.7 x 90.9cm, 2015.
인간의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도, 표정을 꾸미지도 않기 때문이다. 고요한 단순성 속에서 은은히 전해져 오는 소곤거림을 듣는다. 깊이 모를 바닥으로부터 떠오르는 존재의 울림. 이들은 바로 작가 자신의 초상이다.”
허 작가는 9월 14~10월 30일 휴맥스 빌리지 아트룸에서 진행하는 에이컴퍼니 기획전 ‘응시’를 통해 “예술은 너무나 어려운 주제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작가는 사람과 예술을 연결해주는 고리 같아요. 물질을 모아 행복해지는 순간보다 예술 작품과의 교감에서 이뤄지는 정신적 풍요로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깊이감이 있다고 봅니다”고 말했다.
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