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가] 위작… 논란 있지만 결론은 항상 없다?
▲서울미술관 ‘미인’전에 공개된 고 천경자 화백의 여인 시리즈. 사진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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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왕진오 기자) “예술은 사기야.” “예술이란 게 본래 생활에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 우리의 정신이 많이 진보되면 보통 오락으로 성에 안 차잖아! 그때부터 고도의 물건을 찾는 거지. 그러니까 취미의 고급이 예술 시장인 셈이야.”
한국을 떠난 지 34년 만에 귀국한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미술에 대한 일갈이었다.
최근 이우환(79) 작가의 가짜 작품이 거래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10월 20일 인사동 화랑과 이우환 작품을 대량으로 거래하고 있는 대형 화랑을 압수수색했다고 밝혔다. 이 화랑은 전시보다는 그림만 팔고 사는 일명 ‘나까마 화랑’이다. 이곳에서 이우환의 ‘점으로부터’와 판화를 판매했다는 것이다.
이 화랑 대표는 “절대 가짜는 팔 수 없다”며 “그렇게 되면 장사를 못한다. 그림 장사는 투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위작 논란을 감정협회의 잘못이라고 전했다. “감정위원들이 작품을 시기별로, 주제별로 못 보고, 안목도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이우환 위작 논란은 그의 작품이 ‘잘 팔린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2005∼2014년 한국 근현대 회화 작품 가격을 결산한 자료에 따르면 이우환의 작품은 낙찰 총액 711억 원으로 1위였고, 작품 평균 가격은 1억 2500만 원에 달했다.
이우환 작가는 “내 작품에 가짜가 없다.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이 가짜 거래의 소지를 제공한다는 의견도 있다.
천경자 별세 소식에 위작 논란 재발화
10월 22일 천경자(1924∼2015년) 화백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올 8월 사망했고, 9월 초에 사망신고가 접수됐다는 소식이었다. 이와 함께 1991년 세상을 뒤집어 놓은 ‘미인도’ 위작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1991년 화랑협회가 실시한 천경자 ‘미인도(원제: 나비와 여인)’ 감정에는 미술평론가와 작가, 화랑 관계자 등 7명이 참가해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천 화백은 △자신이 그려본 적이 없는 흰 꽃이 모델 머리에 얹혀 있고 △작품 제작 연도가 한자가 아닌 아라비아 숫자로 쓰인 점 등을 들어 “내 작품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화랑협회 측은 천 화백 작품 중에 흰 꽃이 그려진 작품, 아라비아 숫자로 연대를 표기한 작품이 있음을 들어 진품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 뒤 25년 만인 10월 27일 천경자 화백의 유가족인 둘째 사위 문범강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는 또 한 번 “미인도는 조작됐다”고 주장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날 유족들은 “미인도는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장녀 이혜선 씨도 언론을 통해 “우리 어머니는 ‘미인도’를 그린 바 없다”고 지속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
▲K옥션 9월 경매에 나온 고 천경자 화백의 작품. 사진 = 왕진오 기자
문 교수는 “자식의 입장에서 언젠가는 밝혀야 할, 밝혀져야 할 사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을 이었다. 그는 “감정에 참여했던 감정위원 중 한 명으로부터 ‘당시 분위기에 마지못해 수긍했다’는 증언을 들었다. 그는 전체 분위기가 진품이라고 몰아가는 분위기에 휩쓸려 의심스러웠지만 마지못해 동참했음을 시인했다”며 “한 개인, 작가를 여러 기관이 누르기는 쉽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큰 수치다. 추적해 밝혀내는 일은 기자들의 몫이다”라고 주장했다.
유족 “판정 잘못됐다는 감정위원의 증언 있다”
문 교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진품이라는 근거로 내세운 것이 천 화백이 쓰는 물감하고 작품에 쓰인 물감하고 재질이 같다는 것이었다”며 “그 물감을 천 화백만 사용했느냐 하는 게 문제인데, 당시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재료인 석채였다”고 밝혔다.
▲10월 27일 진행된 천경자 화백 유족의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문범강 교수(사진 중앙). 사진 = 왕진오 기자
문 교수는 위작이라고 추정할 만한 증거로 △‘미인도’ 소장 과정에 관한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직원의 자필 증언 △‘미인도’에 쓰인 물감이 당시 널리 사용된 물감이라는 점 △‘미인도’ 위작 감정에 참여한 위원의 증언 △다른 천 화백의 작품과 비교한 미학적 분석 등을 제시했다.
그는 또한 “위작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직원 한 분이 찾아와 서울대학교 마크가 들어간 원고지에 ‘미인도는 위작인지 검증을 거치지 않고 수장된 작품’이라고 적었다”며 “그 직원이 자필로 쓴 원고 촬영 분은 모 신문 기자가 가져갔다”고 설명했다.
‘인사동 스캔들’ 영화까지 나와
잊힐 만하면 등장하는 미술품 위작 논란.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돈이 오고가는 시장 논리 때문”이라는 것이 화랑가의 정설이다.
‘위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2007년 한국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 45억 2000만 원을 기록한 박수근의 ‘빨래터’ 진위 감정 사태다. 1년여의 진위감정 논란 끝에 법원이 진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으로 판결을 내리면서 소동은 막을 내렸다.
세태를 반영하듯 그림 복제 사기를 다룬 영화 ‘인사동 스캔들’이 나왔을 정도다. 영화 속에는 400억 원대를 호가하는 ‘벽안도’가 등장한다.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된 고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관계자가 설명하고 있다. 사진 = 왕진오 기자
“속이려는 자와 속는 자, 믿는 자와 배신하는 자, 지키려는 자와 가지려는 자! 본 것을 믿지 마라.”
당신이 본 모든 것은 어쩌면 가짜일 수도 있다며 현실 속 위작을 비웃은 영화의 선전 문구가 요즘 사태와 겹쳐진다.
이중섭·박수근 위작 2843점 소각됐다지만…
국내 미술계에 대표적인 위작 사건은 이중섭과 신윤복 그림 관련 사태를 우선 들 수 있다. 1992년 이중섭의 황소 그림 두 점을 갖고 있던 소장가가 화랑협회에 감정을 의뢰하면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화랑협회는 가짜로 판정했다. 그런데 한 미술평론가가 진품이라고 주장하며 논란을 빚었다.
2005년 3월 16일 진행된 서울옥션 제94회 한국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에 출품된 이중섭의 ‘물고기와 아이’는 미술품 감정협회로부터 위작 결론을 받았다. 2006년 4월 25일에 서울옥션 제101회 경매에는 변시지 화백의 작품과, 2007년 12월 제106회 경매에 나온 ‘빨래터’ 는 아직도 회자되는 대표적 위작 논란 사건이었다. 2013년 당시 “압수된 이중섭, 박수근의 작품 2843점은 모두 위작”이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고, 이후 화랑가에선 위작 논란이 잠시 가라앉는 분위기였다.
“쉬쉬~”만 하면 상처 절로 낫는다고?
그러나 2012년 123회 경매에 추정가 4∼5억 원에 나온 겸재 정선(1676∼1759)의 ‘황려호(黃驢湖)’가 도난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서울옥션 측은 경매 취소를 결정했다.
당시 이 작품을 경매에 내놓은 위탁자는 “선의의 취득”이라고 주장했다.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법적 근거는 찾기 어렵다. 서울옥션 측은 “위탁자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 ‘황려호’를 샀다”고 밝혔고, 이후 이 작품은 인사동에서 몇 차례 거래를 통해 개인 소장가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복수의 화랑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
▲2011년 갤러리현대에서의 개인전을 위해 화랑을 찾은 이우환 화백. 사진 = 갤러리현대
국내 최고가 경매 낙찰 작품, 가장 잘 팔리는 작가 중 한 명인 이우환, 그리고 작가의 사망으로 다시금 재조명되고 있는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화랑가는 다시 술렁이고 있다.
논란과 관련해 화랑협회 관계자와 미술품감정협회 그리고 인사동에서 오랜 기간 화랑을 운영해온 여러 화랑 주인들은 뭔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발언을 꺼리는 분위기다. 한 관계자는 “시기가 좋지 않다. 진위 여부 판단에 오류가 있었던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는 상황에서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히기는 무리가 따른다”며 “시장 활성화 기미가 보이는 시점에 이런 사건들이 발생해서 안타깝다. 하루빨리 정리돼 안정적 거래가 이뤄지기를 바랄 뿐”이라며 입을 닫았다.
이를테면 ‘시장론’이다. 진품 시비를 해봐야 작품 판매에 방해만 될 뿐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불량식품이 시장에 나돌면, 슈퍼 문을 닫더라도 문제의 제품을 솎아내야 소비자들이 믿고 또 그 슈퍼를 찾는다. “문제가 있지만 쉬쉬~”만 하는 슈퍼에는 곧 발길이 끊어지리라는 사실을 이들은 모르는 걸까?
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