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아티스트 - 정영주] 그림과 조각 사이에서…사라지는 것을 애도
(CNB저널 = 글·박영택 미술평론) 집은 거주의 공간이자 시간과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그래서 집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 그 역시 나이를 먹고 생멸하는 존재다.
인간의 몸은 집과 분리되지 못하고 그 공간 속에서 생을 영위하며 인간이 되어 간다. 그렇게 집은 함께 한 이들의 생애와 공존하고, 그들의 떠남과 죽음 속에서 사라지거나 지워진다. 집은 누군가의 살내음을 맡으며 숙성하고 그 내음이 지워지면 이내 황폐화 된다.
그래서 우리의 몸뿐 아니라 의식 또한 늘 그 집과 결부되어 있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여러 집들을 거치고 특정 공간에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항시 새로운, 이상적인 공간을 꿈꾸고 갈구한다. 지상에서의 집 한 칸, 방 하나는 그토록 절실하고 눈물겹다.
정영주는 이른바 산동네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무수한 집들이 그려져 있는 풍경화다. 산동네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작고 허름한 집들의 집적과 공존을 강조하는 그림이다.
▲정영주. ‘도시 - 사라지는 풍경 - 초야’. 캔버스 위에 한지, 아크릴릭, 97 x 145cm, 2015.
▲정영주, ‘저녁길’. 캔버스 위에 한지, 아크릴릭, 65 x 91cm, 2015.
나지막한 둔덕 전체를 집, 지붕들이 가득 채우고 있는 장면인데 일정한 거리에서 조망한 시선에 의해 저편으로 집들은 산의 능선처럼 이어지고, 깊은 공간감 속에 지지러지듯이 가물거린다.
이 거리감은 저 산동네란 장소성을 추억하고 기념하고자 하는 심리적 거리이자 배려이기도 하다. 대부분 저녁 풍경이다. 어두워져 가는 하늘과 낮아지는 지붕들, 그리고 집마다 숨구멍처럼 난 작은 창에서 불빛이 반짝인다. 이제 곧 짙은 밤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의 풍경을 적막하게 붙들어 매 두고 있다는 인상이다.
지금 이 순간, 저 시간과 분위기 속에서 평화로운, 그래서 고요히 얼어붙은 저 풍경을 영원히 정박시켜 놓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정영주는 어린 시절 산동네에 대한 추억, 회상을 그림으로 그려 보인다. 지난 시절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던 산동네는 지금 죄다 사라졌다. 간혹 남아 있긴 하지만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은 아니다.
▲정영주, ‘새벽길’. 캔버스 위에 한지, 아크릴릭, 65.1 cm x 90.9cm, 2015.
▲정영주, ‘도시 - 사라지는 풍경 09’. 캔버스 위에 한지, 아크릴릭, 112 x 194cm, 2013.
알다시피 한국 사회의 변화 과정은 현기증을 동반할 정도로 빠르고, 과거나 추억, 역사를 내재하고 있는 공간과 사물을 허락지 않는다.
개발과 자본에 대한 지치지 않는 욕망이 압도적인 이곳에서 오랜 시간의 흔적이 스민 동네풍경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정영주는 자신의 유년 기억을 환생시켜 현재의 삭막한 공간과 시간의 부재를 대체하고자 한다. 그것은 추억 속에서 따뜻하게 번지는 온기와 불빛을 온전히, 안쓰럽게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의 배려다.
그러니 정영주의 집 그림은, 사라지고 소멸된 어린 시절 산동네의 추억을 기억 속에 영원히 남기고 싶다는 욕망으로 그려진다. 한편으론 현재 도심의 빌딩이나 현대식 건물의 뒤쪽에 방치되거나 버려진 작은 집, 허름하고 누추한 집들에 대한 반전의 의미도 있어 보인다.
역설적으로 이 가난하고 버려지는 집들만을 화면 가득 채워 그들의 존재를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식이다. 결국 작가의 산동네 풍경은 그런 의미 아래 재현되고 있다. 따라서 그 풍경은 실제 풍경이 아니라 작가의 기억 속에 간직된 관념의 풍경이다.
▲정영주, ‘달밤’. 캔버스 위에 한지, 아크릴릭, 65.1 x 90.9cm, 2015.
구체적인 산동네의 실제 하는 공간, 장소가 아니라 개념적인 장면연출이고 급격한 소멸과 사라짐 속에서 악착스레 빛을 뿜어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키려는 존재에 대한 은유적 성격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일반적인 회화적 방법론 대신에 한지를 이용해 부조적인 표면처리를 하고 있다.(중략)
조각적인 공정에 가깝고 평면과 한지라는 오브제, 물질의 결합을 통한 이중의 화면 구성, 그리고 지붕과 벽으로 대변되는 집의 외형을 실제처럼 자연스럽게 형상화하는 독특한 방법론이 눈길을 끈다.
그리기와 만들기,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의 결합과 공존이 그만큼 인상적인 화면을 제공해준다. 표면에서 엿보이는 흥미와 함께 판자촌이나 산동네에 대한 회상과 그 추억의 영원성을 지닌 주제의식이 상호 맞물려 있는 그림이다.
정영주는 어린 시절 산동네나 집들에 대한 추억과 회상, 맹렬히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애도의 심정, 아울러 고층건물과 현대식 건물에 가려 그 그늘에서 죽어가는 것들, 그렇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여받지 못하고 방치된 것들, 그로 인해 자신의 따뜻하고 소중한 기억과 추억도 동시에 죽어가는 듯한 느낌 속에서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독특한 방법론 아래 연출하고 있다.
나로서는 최근 이 같은 산동네 풍경이 빈번하게 그려지고 있음이 흥미로웠다. 아마도 산동네나 빈한한 한국 근대화의 자취를 도심에서 겪어낸 세대들이, 지난 시공간을 추억할 수 있는 거리가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한국인의 상당수가 저 산동네와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으로 공유하는 지점이 크기 때문일 수도 있어 보인다.
▲정영주, ‘설경’. 캔버스 위에 한지, 아크릴릭, 112 x 163cm, 2012.
초고층 빌딩과 최첨단 현대식 건물이 앞 다투어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면, 지금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저 누추하지만 무엇보다 인간적이기도 했던 산동네 풍경이 그만큼 그립고 정겨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향수나 추억이 단지 서정적으로만 윤색되거나 재미있는 소재로만 다루어지는 것은 아쉽다.
이 산동네 풍경은 한국의 근대화와 도시화의 문제들, 자본주의의 욕망들, 그리고 인간적인 생의 공간에 대해, 나아가 시간과 기억의 관계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해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정영주 역시 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조형화할 수 있는지 또한 고려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그리고 있는 산동네의 다음 장면을 기대해본다.
(정리 = 왕진오 기자)
박영택 미술평론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