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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아티스트 - 손유선] 이름을 초월하는 찰나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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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63-464호(신년) 윤하나 기자⁄ 2015.12.31 08:52:02

▲손유선 작가. 사진 = 윤하나 기자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윤하나 기자) 김춘수의 시 ‘꽃’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시구가 있다. 작가 손유선의 작품을 보면 그는 이 구절을 이렇게 고쳐 쓸 것 같다. ‘그가 꽃이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것은 붉은 색 구름으로 만든 꽃이 되었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결코 동일하지 않은 의미를 이름으로 주고받는다.” 

김춘수가 이름 부름이 가진 마법적 연결고리를 말했다면, 손유선은 이름이 갖는 ‘불확실함의 가둠’에 주목한다. 그의 작업은 말, 곧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에 대한 의구심에서 시작한다. 

사물은 내가 부여하기 이전에 이미 약속된 이름을 부여받았다. 우리는 그 부여받은 이름 아래 저마다 다른 이미지를 사유한다. 그 이미지란 본래의 사물과 가까울 때도 있지만 각자의 선입견으로 인해 아주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애초에 본래의 사물이란 그것이 무엇인지 규정지을 수조차 없이 광범위한 분류의 집합인 경우가 많다. 작가는 꽃을 대상으로 이름 지음의 태생적 불확실성에 대해 고민한다. 

▲손유선, ‘Red Violet’, 캔버스에 유화, 91 x 91cm, 2015

꽃은 중세시대부터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귀족들 사이에서 값비싼 사치재로 여겨졌다. 향기롭고 보기에 아름다운 꽃을 수집하고 기르는 것이 유행이었다. 반면 유럽 최대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 이후,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많이 그려진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꽃은 죽음을 암시하는 허무함을 상징한다. 꽃을 작은 사치로 여기거나 축하, 고백 혹은 조의의 의미로 주고받는 오늘날에도 꽃의 짧은 생명이 암시하는 덧없음을 싫어하는 이도 적지 않다. 

▲손유선 작가의 ‘퍼머넌트 레드(Permanent Red)’전 전시장 전경. 사진 = 윤하나 기자

손유선의 꽃은 각자 이름과 의미를 부여받은 꽃들, 이를테면 장미, 개나리, 국화 등이 아니다. 그저 빨간 꽃, 노란 꽃, 하얀 꽃이 되어버리는 추상적 지시어다. 작가는 ‘눈앞의 대상을 추상화 시켜 그것을 꽃이란 이름에 가두는 행위’를 캔버스 위로 옮기며 그 과정 가운데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탐구한다. 

일찍이 페인팅에 매료된 손유선은 캔버스라는 사각 틀을 이용해 이름이 지닌 ‘가둠’의 성격을 표현한다. 그리고 각각의 캔버스 위에 꽃이 갖는 상징적 이미지를, 다른 색감과 붓질 패턴의 변용을 통해 작가 임의로 구분한다. 손유선의 이번 전시회 제목 ‘Permanent Red’처럼 작가의 페인팅 작품의 이름은 색의 이름으로 통일됐다. 

▲손유선, ‘Ruby’, 캔버스에 유화, 91 x 91cm, 2015

작가는 “우리는 저기 핀 꽃을 볼 때 그저 빨간 꽃, 노란 꽃처럼 그 꽃이 가진 색감으로 또 다른 이름을 부여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그 과정의 불명확함과 지시적 정언성에 집중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꽃 위에 눈에 띠는 한 가지를 추가한다. 결코 읽어낼 수 없지만 마치 이국의 글자처럼 보이는 기호다. 작가는 꽃이라는 이름이 작가에게 주는 이미지로 캔버스 대부분을 가득 채운다. 강렬한 색감과 다소 부담스럽고 괴기스러운 형태의 꽃, 그 안의 디테일은 저마다 다른 것을 담고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름이란 틀에 갇힌 이미지를 다시… 

손유선이 ‘꽃’이란 동일한 이름에 대해 고민하며 작업한 작품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꽃의 색감,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위에 올린 기호이다. 누군가 불러준 꽃이라는 이름의 차원을 넘어 작가는 그 ’발화된 순간의 꽃‘을 페인팅을 통해 발견한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난 꽃 위에 작가 스스로 마련한 기호를 올림으로서 찰나에 발견한 꽃을 사각 틀 안에 가두고 그것은 순간의 꽃을 위한 부적이 된다.

작가는 기호의 다양한 용법 중 부적에 관심을 드러냈다. 잡귀와 액운을 막기 위해 종이 위에 글씨나 그림을 그려 집 대문이나 처마 아래 붙이는 부적은 때로 기원의 의미를 갖는다. 단순하게는, 작가의 그림이 기호와 이미지를 이용한다는 방식에서 유사점이 있다. 그리고 부적을 지닌 집, 혹은 사람에게 그 부적이 주는 주술적 믿음이 작가에겐 곧 이름이 발휘하는 연상 에너지와 비슷하게 작용한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손유선, ‘Sky blue’, 캔버스에 유화, 91 x 91cm, 2015

▲손유선, ‘Rainbow’, 캔버스에 유화, 91 x 91cm, 2015

‘Ruby’ ‘Red Violet’ ‘Medium Purple’ ‘Rainbow’ 등은 손유선이 발견한 꽃의 색 이름인 동시에 각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가 작품에 부여한 이름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가가 기호를 짓고 작품에 올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꽃이 아닌 또 다른, ‘부를 수 없는 이름(기호)’을 가진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된다. 

손유선은 이제 막 석사학위 청구 전시를 치르게 된, 어찌 보면 늦깎이 신인 작가다. 미국의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를 보며 남보다 늦은 나이에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오랜 기다림 때문인지 손유선이 작업을 대하는 태도는 누구보다 정열적이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자신의 작업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좋은 작업을 향한 욕심과 열망은 숨기지 않았다.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고민했을 많은 것들을 소탈하게 넘기면서 “그저 오래 작업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작가와 대화하면서 그는 여느 미대생과 마찬가지로 ‘작가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좋은 작가는 무엇인지’ 등을 고민한다고 했다. 

좋은 작업을 하는 작가가 좋은 작가다

좋은 작가란 무엇인가? 너무 구태의연한 질문일까? 그렇다면 누군가를 좋은 작가로 규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작가는 특출한 능력이나 화려한 경력, 대단한 누군가의 비호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2000년대 이후부터 미술시장에서 눈에 띄는 작가들은 대개 청년이라 부름직한 어린 나이에, 이름난 국내외 대학에서 공부한 후 공모전이나 기획 단체전을 통해 일찍이 자신을 작가로 알려 왔다. 그 이전의 작가들은 이보다 폐쇄적인 길을 통해 혹은 오랜 고행 끝에 작가 호칭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본질적인 작가의 정체성은 이런 관행적 절차만을 통해 형성되지 않는다. 작가는 만들어진 길 위에서가 아니라 작가 스스로의 절대적 고민의 양에서 나온다.

▲손유선 작가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 ‘꽃’을 대상으로 작업 세계를 펼쳤다. 사진 = 윤하나 기자

오늘날 미대에는 막연한 미래를 짊어진 채 열정 하나로 작가를 꿈꾸는 지망생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수많은 미대생 가운데 소위 이름을 알린, 혹은 좋은 작가가 되는 경우는 매우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지속하고 싶다면, 끝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작업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고민하는 일밖에 남지 않는다. 자신에게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작업이란 어찌 보면 별 볼일 없는 경우가  많다. 끝없이 사유하고 의심하기가 빠진 관성적 작업은 구태의연할 뿐이다. 

시인 김춘수는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가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작가에겐 자신의 내면을 끝없이 불러냈을 때 그가 찾아와 작업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한마디로 좋은 작업을 하는 작가가 좋은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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