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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의 요즘 미술 읽기] 미술가가 발레하면 미술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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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66호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2016.01.21 09: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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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1. 장르 해체 (장르의 경계 넘나들기)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즐겨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것도 정말 미술 작품인가?”라는 질문을 해보거나 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미술의 범위에 결코 포함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자주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현재진행형의 미술이 갖는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그 정체를 명확히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물질적 결과물보다 관념을 중요시하며 끝없이 자기 질문을 던지는 개념 미술, 첨단의 과학 기술을 이용하는 미디어 아트(media art) 등이 부상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오늘날의 관람객은, 단순히 회화인지 조각인지, 순수 미술인지 디자인인지를 구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는다. 몇 개의 단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띤 작품들이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까지 대부분의 미술은 명확한 장르 안에 존재했다. 장르의 구별이 명확한 만큼 재료(매체)의 선택도 정해진 범주 안에서 이뤄졌다. 혁명적인 미술가들의 형식 실험들은 각각의 장르가 가진 독립성을 흐릿하게 만들지 않았다. 무엇을 그렸는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없어 사람들이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추상 미술의 경우에도 그것의 장르 자체를 구별하기 어렵거나, 그것이 미술인지 아닌지를 궁금해 해야 하는 상황을 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보편적인 기준을 따른 정답의 추구보다 차이와 다양성, 개별성을 지향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미술가들은 그 동안 당연시되었던 장르의 구별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예술을 둘러싼 고정관념과 권력에 대한 탐구뿐 아니라 보다 다채롭고 풍부한 표현을 성취하기 위해 미술, 더 나아가 예술에 부여된 경계들을 해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드시 경계를 없애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계를 넘나들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장르의 구별이 어려운 작품, 특정한 장르의 고유성을 뛰어넘는 재료들을 사용한 작품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천년(A Thousand Years)’(1990)에는 소의 머리와 파리가 등장했고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1991)에서는 뱀상어가 선택되었다.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양과 얼룩말 같은 동물들과 나비, 해골이 사용되기도 했다. 

장르 경계 넘지 말란 법 없으니 

사라 제(Sarah Sze)는 생수병, 깡통, 면봉, 엽서, 과자 봉지처럼 예술과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일상의 물건들을 이용해 건축적인 설치 작품을 만든다. 국내 미술가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일례로 이예승의 ‘동굴 속 동굴(CAVE into the cave)’(2013)은 원형의 스크린 안에 놓인 기계 장비들과 지극히 평범한 일상용품들이 결합돼 환상적인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설치 미술(installation art)의 경우 작품 자체뿐 아니라 그것이 놓이는 시공간, 관람자와의 상호작용까지도 작품의 일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전의 미술과는 구별된다.     

한편 장르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예술가들이 융·복합적인 협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사례도 늘어났다. 레이디 가가(Lady Gaga)와 데미안 허스트,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함께 했던 MOCA(Museum of Contemporary Art)의 30주년 기념행사는 아직까지도 회자된다.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서로 조화롭게 뒤섞이는 퓨전(fusion)은 우리 일상에서 이미 익숙한 것이 되었다. 시대와 호흡하기를 원하는 미술가들이 그러한 변화에 발맞추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예승, ‘동굴 속 동굴’, 듀랄리늄 M157 원형 스크린(6M), 마이크로컨트롤러, 모션 센서, 일상 오브제, 밥상, 전등, 의자, 가변설치, 2013. 사진제공 = 이예승 작가

이 같은 맥락에서 진시영은 2012년부터 꾸준히 미디어 아트가 결합된 발레 공연의 제작에 참여해왔다. 지난해 12월 선보인 그린발레단의 ‘항해(Voyage)’는 실험성과 대중성 모두에서 주목받았다. 분홍색 구두를 신은 코끼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현대판 우화를 보여주는 이정윤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하이힐의 굽을 연상시키는 설치 작품을 12개 장르(설치 미술, 만화, 영상, 한국무용, 현대무용 등)가 함께하는 융·복합 공연인 ‘똥’이 진행되는 무대에 설치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발걸음을 맞추기에 숨이 차다고 느낄 수도 있는 현재의 미술을 조금 더 쉽게 만날 기회를 제공한다.

말 걸고 공감 구하는 것은 모든 미술이 같아

어떠한 새 시도이든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고 불안해하거나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미술이 이상해졌다고 거리를 두거나 경계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편안하게 한걸음씩 나아가면 된다. 그것이 회화이든 설치이든, 그 어떤 장르적 모습을 보여주든 간에 작가는 작품을 통해 예술, 그리고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던지며 공감을 구하려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조급함을 느껴온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긴장을 조금만 풀어보면 어떨까. 우리의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아졌다고, 볼거리가 많아졌다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설치 미술, 퓨전적인 시도가 일상이 되었다고 해서 융·복합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작품이 고리타분하거나 시대에 발맞추지 못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들은 동시대 미술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이 오늘날 미술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되어서도 안 된다. 여전히 전통적인 의미의 회화와 조각 작업에 매진하는 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존재한다. 결코 어떤 것이 ‘더 좋다, 나쁘다’라는 식으로 단순화시켜 우위를 가릴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마 중요한 것은 이 모두가 우리의 현 시대와 호흡하는, 살아 있는 미술의 소중한 부분들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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