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공부쟁이. 신유정(25) 작가를 만나고 난 뒤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였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이며 직접 바리바리 싸들고 온 작품을 주섬주섬 꺼내는 모습은 절로 ‘엄마 미소’를 짓게 했다. 그런데 작품 이야기가 시작되자 철학부터 종교학 이야기까지 열정있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새내기 작가로서의 고민과 그간의 탐구 과정을 짐작케 했다.
올 여름 경희대 미대 회화과 졸업 예정인 그녀는 현재 ‘벌거벗은 생명’ 시리즈에 주력하고 있다. 시리즈의 일환인 ‘벌거벗은 인간’엔 울창한 숲속 한 가운데 나체로 서 있는 인간, 그리고 그를 둘러싼 새와 늑대, 양 등 여러 동물의 모습이 보인다. ‘호모 사케르’에도 나체 인간이 등장하는데, 인체 해부도처럼 안이 꿰뚫어 보이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신유정, ‘호모 사케르(Homo Sacer) #1’. 면에 염색과 아크릴릭, 250 x 140cm. 2015.
두 작품 모두 피투성(被投性)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 자체에 주목하며 명명한 단어다.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태어나 세계 속에 던져진 인간의 모습, 즉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 살아가는 상태를 뜻한다. 그리고 이 피투성은 불안이라는 감정 속에서 자각하게 된다. ‘왜 나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걸까’ ‘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 불안을 내포한 질문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
“빠르게 발전돼 가는 문명 속에서 점차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이 퇴색되는 시대예요. 직접 삽으로 땅을 파지 않아도 포클레인이 땅을 파고, 불을 피워 음식을 데우지 않아도 전자레인지가 음식을 데우죠. 세상은 점점 편리해졌지만 뭐든 쉽게 가능해지면서 인간 자체의 존엄성과 가치는 예전보다 퇴색됐고, 무언가 의미를 더 찾아보려는 저항 의식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홀딱 벌거벗고 속이 다 드러나는, 태초의 상태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즉 스스로의 결여를 인식해서 입기 시작한 옷도 필요 없이, 본연 자체가 지닌 가치에 집중하고 이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길 바랐어요.”
▲신유정, ‘세폭화 #1’. 자개장 문, 반짝이, 접착제, 아크릴 물감, 옻, 모델링 페이스트, 5 x 210 x 150㎝. 2014.
작품의 배경으로 주로 등장하는 숲, 그리고 그 안의 사과나무는 창세기에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살았다는 에덴동산이 모티브다. 작가 본인은 종교가 없지만,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관심에서 종교학을 찾아보다가 작품에 다루게 됐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찾아보거나, 인터넷 강의를 찾아보면서 연구하는 스타일이다.
철학과 종교학 이야기는 파면 팔수록 범위가 넓고 복잡하다. 하지만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의외로 단순하다. 1~3학년 시절 이사를 스무 번도 넘게 다녔다. 기숙사 생활을 하기도, 원룸에 혼자 나와 살기도, 친척집에 살기도 했다. 그런데 이사할 때마다 산더미 같은 짐이 생겼다. 이 짐을 대하는 자신과 타인 각각의 태도에서 존재 하나하나에 부여되는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고.
버려지는 것들의 가치를 재구성
“제게는 굉장히 소중한 물건을 다른 사람들은 쓰레기로 여기고 버리라고 할 때가 많았어요. 처음엔 단순히 이 물건들을 버리기 싫어서, 지키기 위해서 작품 재료로 활용했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 느낀 게 많았습니다. 어느 순간 물건을 바리바리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 필요할 때마다 사서 쓰고 후딱 버리는 게 효율적이라고 느끼는 저를 발견한 거예요.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 삶이 편해지면서 처음의 소중했던 가치를 점점 잊어버린 거죠. 정말 보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빌려서 열어 보던 도판들이 지금은 SNS나 인터넷을 통해 쉽게 얼굴을 들이밀어 더 이상 소중하게 안 느껴지는 것처럼요. 점점 모든 것들이 가치를 잃어간다고 느꼈어요. 현 시대의 인간처럼요.”
▲신유정, ‘벌거벗은 인간 #5’. 자개장 조각에 과슈, 25 x 23cm. 2015.
▲신유정, ‘리버스 페인팅(Reverse Painting) #3’. 액자에 과슈, 17 x 13.5cm. 2016.
그래서 또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가치의 재고와 부활이다. 일단 작업할 때 쓸모없어진 것들을 모아 주재료로 활용했다. 옛날엔 혼수 용품 1순위였으나 이젠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자개장, 사진이 빠져 쓰이지 않는 액자, 부러진 나무판자 등 더 이상 제구실을 못하는 재료들을 한 데 모았다. 큰 자개장을 잘라내 붙이고, 나무판자의 뜯어진 부분을 그대로 살리고, 액자 위엔 그림을 그리는 등 재료의 특성에 맞춰 작업했다. 그리고 이 재료들은 작품으로 재탄생하며 새로운 존재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았다.
작품에 등장하는 각각의 이미지들도 주목된다. 모두 옛 종교 벽화 등 다른 이미지들에서 가져와 그린 것이다. 저작권 문제가 없는 옛 그림을 중심으로 자료를 찾았다. 한 그림 속에도 중요하게 부각되는 부분과, 저 멀리 구석에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녀는 그 구석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외면 받던 부분들을 한 작품에 모아 전면에 부각시켰다. 그렇게 모인 이미지들은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며 힘차게 첫 날갯짓을 하는 듯하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라 가치 있는 존재였어”라고. 그리고 이건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지 못한 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신유정, ‘벌거벗은 인간 #4’(부분). 나무에 과슈, 26 x 28.5cm, 2015.
새로운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은 ‘벌거벗은 생명’ 시리즈뿐 아니라 드로잉 작업에서도 발견된다. 길을 걸으면서 좋아하는 노래를 듣다가 문득 생각했단다. ‘그림에 시간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라고.
“일반적으로 노래는 시간 예술, 그림은 공간 예술이라 이야기하죠. 노래는 멜로디가 이어지고, 그림은 한 눈에 보이니까요. 그런데 노래를 그림에 넣을 수 있을까 궁금해졌어요. 그림에 시간성을 부여하면 새로운,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세로 150cm에 가로 50m 크기로 정말 긴 그림을 그렸어요. 이 그림은 시간을 들여 걸으면서 볼 수밖에 없어요. 그림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시간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도한 작업이에요.”
또 다른 드로잉 작업의 일환인 ‘그녀가 낳은 것’에서는 어렸을 때 좋아했던 동화책이 자서전으로 부활하며 새로운 가치를 찾았다. 크레파스로 동화책을 까맣게 칠하고, 이 위에 새로운 글들을 채워가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신유정, ‘야상곡’. 캔버스에 유화, 72.7 x 72.7cm. 2014.
이처럼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기 위해 그녀는 작업을 한다. 말도 서투르고, 글도 잘 못 쓴다는 그녀는 “작업을 할 때만큼은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지식에 한계를 느껴 작업할 때 늘 작업 주제와 관련되는 강의를 틀어놓는다고 한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더 깊이 주제를 파고들려는 노력이다.
아예 한 학기 휴학을 하고 직접 강의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만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다. 취미는 엉뚱하게도 사전을 읽는 것. 한 단어에서 생각도 못한 의미를 발견할 때, 몰랐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것 같아 즐겁다고 한다. 실생활에서도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는 게 몸에 배었다. 가치 발굴 작업은 추후 작업에서도 계속 주력할 생각이다.
“정말로 가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성스러운 것은 시간과 공간을 바꾼다고 하죠. 예컨대 도로에 있다가 교회나 성당 등에 들어가면 사뭇 다른 공간이 펼쳐지는 것 같죠. 그런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아주 원대한 꿈일 수도 있는데, 제 그림을 보는 그 순간만큼은 가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실존과 가치에 대한 주제는 계속 탐구할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