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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가] 최고 꿈꿨지만, 이제 ‘보통’ 우러보는…

박혜수 ‘Now Here is Nowhere’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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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72호 윤하나 기자⁄ 2016.03.03 08:57:46

▲3층의 전시 전경. 멀리 떨어진 ‘월드 베스트(World’s Best)’를 시샘하며 회전하는 ‘A0 to A8’가 설치됐다. 사진 = 송은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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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윤하나 기자) 송은아트스페이스가 송은미술대상의 대상 수상작가 박혜수의 개인전 ‘나우 히어 이즈 노웨어(Now Here is Nowhere)’를 지난 2월 23일 열었다.

박혜수는 시간, 기억, 꿈 등 일상적인 추상 개념에 관심을 갖고 작업해 왔다. 특히 이번 대상 수상작인 ‘프로젝트(Project) 대화 vol.2 - 보통의 정의’는 작가가 2011년부터 진행한 설문 조사를 기반으로 ‘보통’이란 관념에 대해 작업한 결과물이다.

설문 조사로 본 보통의 정의

사실 보통은 2009년 출간된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를 통해 우리에게 자리 잡은 개념이다. 이전까지 ‘평범한 삶’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이 사회 전반으로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예전이라면) 보편적 수준의 삶을 선망하고 평균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이런 평범, 보편, 평균에 대한 기대와 선망이 ‘보통의 존재’에 대한 인기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보통 프로젝트는 이렇게 확산된 우리 사회의 잣대에 의문을 가지면서 시작됐다. “보통이라도 되고 싶다” 혹은 “애를 써야 그나마 보통으로 산다”며 자조적으로 보통을 희망하는 이들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박혜수 작가가 2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글루미 먼데이(Gloomy Monday)’를 연주하고 있다. 한국, 영국의 월요일 신문에서 부정적 단어가 쓰인 자리에 구멍을 뚫어 멜로디박스에서 연주될 수 있는 악보로 바꿨다. 사진 = 윤하나 기자

2월 2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작가는 자신의 프로젝트가 보통이란 관념에 대한 설문 조사를 기반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2013년 소마미술관 전시에서 보통에 관해 7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이번 전시가 이뤄졌다. 그리고 작업 결과물을 묶어 출판물을 제작하고 프로젝트는 종료된다.

왕좌에는 항상 백기가 준비돼 있다고? 

이번 전시에 선보인 설치, 조각, 텍스트 작업들은 2가지 개별적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그 중 하나는 ‘보통’ 프로젝트로서, 이번 전시를 계기로 출판물로 발행돼 비로소 프로젝트가 완성됐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송은아트스페이스 2~4층 총 3개 층을 관통하는 금속 설치물 ‘월드 베스트(World’s Best)’다. 이 작품은 경쟁 사회에 살면서 최고를 꿈꿨던 모든 이들의 표상이다. 넓은 하단부에서부터 급격히 좁아지는 상부로 이어지는 사다리 같은 모양으로, 꼭대기에는 은빛 왕좌가 자리 잡았다. 이 최고의 자리에는 백기 2개가 꽂혀 있다. 하나는 2등의 백기, 또 다른 하나는 앞으로 자리를 비울 1등을 위한 백기라고 작가는 말한다. 왕좌의 주변에는 스포트라이트와 패배의 기운이 함께 맴돈다. 환한 조명은 환상 같은 환영을 비춘다. 그러나 세계 최고, 혹은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절망적 과정이 ‘World’s Best’에 담겨 있다. 

▲박혜수, ‘굿바이 투 러브(Goodbye to Love)’ 전시 전경, 2016. 사진 = 송은아트스페이스

▲4층 메자닌에서 바라본 ‘월드 베스트(World’s Best)’의 왕좌. 백기 2개와 스포트라이트가 눈에 띈다. 사진 = 송은아트스페이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자기 아이를 천재라고 여기는 모든 엄마들을 떠올렸다”고 했다. 최고가 되라고 키워진 아이들은 최고가 좌절된 어른이 돼 이제 그저 보통을 갈망한다. 최고의 자리는 언제나 한 명에게 돌아가며 나머지 사람들에겐 절망만 남을 뿐이다.

설문을 통해 살펴본 세대별로 다른 보통에 대한 관점이 이를 설명한다. 10대에게 보통이란 결코 되고 싶지 않은 대상이다. 이들은 아직까지 남과 다른 모습의 최고를 꿈꿀 수 있는 세대다. 하지만 20대부터는 점차 보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특히 50대에게 보통은 이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최고가 될 수 없는 대다수는 아마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누군가의 삶을 보통이라 여기는지도 모른다.

최고의 좌절에서 보통의 좌절로

이밖에도 ‘보통 검사’ 설문의 주관식 답변을 바탕으로 개념 작가 태이 요헤에게 의뢰한 추상시 10편, 어두운 방안에서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레이저 수평계 설치가 눈에 띈다. 특히 브릿지를 넘어 도달하는 이 암흑 공간은 보통의 삶에 있어 절대적 기준이 되는 평균에 관해 커다란 의문을 시사한다. 관람객이 레이저 수평계가 설치된 단 위를 걸으면 수직, 수평의 레이저 기준선이 흔들린다. 세계는 어둡고, 선명하던 기준점은 조금만 좌표를 바꿔도 실낱같이 흔들린다.

▲박혜수, ‘가변적 평균대’. 가변 크기, 금속 구조물, 레이저 수평계. 2016. 사진 = 송은아트스페이스

또 다른 작업 ‘게임 월드 베스트(Game World’s Best)’에는 일반적인 젠가(쌓아놓은 나무토막의 중간을 빼내는 게임)와 동일한 게임 법칙이 적용된다. 아래의 나무토막을 위로 쌓으면서 나무에 부착된 트로피도 함께 올라간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트로피가 우승하고, 자리잡기에 실패하면 바닥의 잔재처럼 산산이 부서진다.

▲박혜수, ‘월드 베스트(Worlds Best)’. 가변 크기, 금속 구조물, 스텐, 깃발, 조명, 거울. 2016. 사진 = 송은아트스페이스

3층 전시실에서 보이는 ‘월드 베스트(World’s Best)’와 거울 설치작품 ‘A0 to A8’은 최고를 선망 혹은 시샘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종이 규격인 A0부터 A8까지 다양한 크기의 거울들이 걸려 있고 이들은 수시로 회전하며 월드 베스트를 비춘다. 저마다 다른 규격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같이 최고를 주시하지만, 정작 이들은 제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힘겨워 보인다. 

사랑은 실연의 과거형

또 다른 프로젝트는 4층에 선보이는 ‘프로젝트(Project) 대화 vol.3 - 굿바이 투 러브(Goodbye to Love)’다. 작가가 진행한 ‘실연 수집’ 설문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옛 연인이 남긴 사연과 물품을 수집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 대표작 2점을 선보인다. 

▲박혜수, ‘게임 월드 베스트(Game World’s Best). 가변 크기, 나무, 트로피 심벌, 체스 시계. 2016. 사진 = 윤하나 기자

작가가 수집한 사랑의 흔적들, 이를테면 앤 윌킨슨의 시가 프린트된 퍼즐, 지나간 사랑을 위해 접었던 학, 옛 배우자의 결혼반지 상자 등이 전리물처럼 전시됐다. 결국 과거의 사랑은 누군가에게 쉽게 넘겨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박혜수는 2000년 ‘시간의 깊이’전을 시작으로 꿈, 예술가로 살아남기, 보통, 사랑 등 추상적 일상 개념을 주제로 작업해 왔다. 전시는 4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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