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윤하나 기자) 고재인의 호기심어린 눈만 보면 마냥 앳된 여대생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숨 고르듯 마음에서 골라낸 말들은 세상을 이미 오래 산 노인 같은 구석이 있다. 발랄한 동시에 조숙한 면모가 돋보이는 작가는 인터뷰 내내 명쾌하게 대답했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아니, 어쩌면 그 명쾌함은 자신이 살아온 길을 정면으로 감내해 낸 사람이 갖는 태도인지 모른다. 굉장히 부드럽고 연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멘탈’을 지닌 그녀를 만났다.
‘나’로부터 비롯된 보편성 나누고 싶어
공감이란, 가볍게 치부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마법과도 같은 현상이다. 쉽고 당연한 일이 어려워지는 시기가 있다. 어른이 되면서부터 어느새 이해 받고 싶고, 공감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숨기는 습관이 미덕이 됐다. 외로움을 인정할 용기도, 도움을 주고받을 깜냥도 퇴화된 세대에 관해,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재인, ‘엄마의 노안’. 가변 크기, 혼합 재료. 2013. 사진 = 고재인 작가
작가는 자신을 한국과 멕시코 이중국적자라고 소개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의 직업 특성상 1~2년 단위로 나라를 이동하며 살았다고 한다. 길게 사귄 친구도, 오래 살아온 동네 골목도 없는 그녀의 유년 시절은 언뜻 듣기에도 무척 외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특별함으로 귀결되길 원치 않으며, 마치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랫말처럼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가 되길 바란다.
작게는 현재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거나, 주변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는 메시지를 나누는 것부터 시작해 나아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자신 안에서 발견하고 싶다고 말한다.
▲고재인, ‘어느 유목민 가족에게’. 스테인리스, 아크릴, 혼합 재료, 256 x 80 x 90cm. 2015. 사진 = 고재인 작가
인간이란 공통점 덕분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작가는,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외로움을 체념하고 소화했는지도 모른다. 어설픈 관계를 억지로 엮기보다는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본질적 동질감과 연대의 회복이 어쩌면 그녀가 말하려는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를테면 자신이 즐겨 듣는 오래된 유행가의 가사나 음률처럼 온전히 이해되지 않더라도 결국 공감하고 흥얼거릴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지금까지의 작업들은 모두 내 실제 경험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나만의 것으로 남길 원하진 않는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면서 “특별한 사람이 되기보다 자신이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작업한다”고 말했다.
잔영 남기는 바람처럼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그녀의 작업에는 유목, 불안, 불면, 길 잃음 등의 키워드가 녹아 있다. 설치 작업 ‘어느 유목민의 가족’은 쉼 없이 이동하며 회전한다. 공중에 매달려 돌아가는 모터에 따라 촛대와 수술이 모두 움직인다. 이동은 끝이 없고 촛불이 남기는 잔상과 함께 설치물은 공전과 자전을 이어간다. 점이 모여 선을 이루듯, 작가는 유목민의 이동보다 이동선 내의 점들이 점진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주목했다. 마치 이동하는 매 순간과 그 순간마다 남겨지는 잔상이 유목민에게는 정착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듯.
▲고재인, ‘보이는 것 이상의 것 - 여지’. 가변 크기, 나무, 경첩, 페인트 등. 2015. 사진 = 고재인 작가
계속해서 움직이는 모터로 인해 작은 방울과 장식들이 짤랑이며 소리를 만든다. 마치 “나 여기 있어요. 여기 살아 있어요”라고 말하듯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그러면서도 공중에 매달려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며 발치에 달린 수술로 닿을 듯 말 듯 바닥을 스치고 지나간다. 존재감을 소리와 표면 온도로 표현하는 바람처럼. 친구들이 자신에게 “넌 참 바람 같아. 보이지 않아도 어느새 주변이 너로 가득 찬 것 같아”라고 말한다며 배시시 웃는 그녀가 작품에서도 여실히 보인다.
불투명한 게 더 아름다워
작품 ‘여지’는 작가가 밤늦은 시간에 혼자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점포의 셔터 틈에서 시작됐다. 가게의 셔터는 바닥에서부터 고작 정강이 높이까지 열려 있었지만 작가는 그 틈이 만들어내는 광경이 너무도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이 광경을 보며 작가는 책 ‘투명사회’를 읽으며 고민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과연 완전히 투명한 것만이 가장 옳고 아름다운가? 불투명한 것이 오히려 더 아름답지 않을까?’란 물음을 갖고 이 작업에 착수했단다. 그래서인지 작품의 곳곳은 손으로 직접 열 수 있게 개방된 듯 보이지만 어떤 부분은 못으로 여닫음이 제한돼 있다. 인간만의 특권인 상상력은 불투명하고 가려진 틈에서부터 발현된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상상할 여지가 남은 것이 오히려 더 아름답다. 슬그머니 가려진 것의 아름다움을 그녀는 관찰자로서 발견해 나간다.
▲고재인, ‘각막의 탓’. 스테인리스, 볼록렌즈, 모터, 180 x 60 x 60cm. 2015. 사진 = 고재인 작가
작가의 관찰자적 면모는 ‘각막의 탓’에서도 잘 드러난다. 자신과 친밀한 이의 장단점은 강렬하게 인식하면서도, 친밀하지 않은 누군가의 이미지는 남의 이야기나 첫 인상에 크게 좌우되는 경향을 작가는 각막의 탓으로 돌린다. 여기서 각막은 관점의 비유다. 사람의 관점은 너무도 주관적이며 왜곡되기 쉽지만, 각막의 성질을 인정하고 최대한 360도 주변을 둘러보고자 노력하자는 것이 작품의 태도다.
작가는 사람의 얼굴보다 큰 돋보기(볼록렌즈)를 이용해, 태생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는 각막이지만. 사람을 최대한 깊고 자세히 관찰하려 노력하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고재인, ‘길 잃은 침대(Lost Bed) - 인섬니아’. 철제 침대 틀, 실, 천, 나무, 전구 등 혼합 재료, 210 x 190 x 110cm. 2013, 사진 = 고재인 작가
그녀는 자신을 계속해서 혼자인 사람이라고 강조하지만 결코 외로움을 성토하는 투는 아니다. 혼자임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무리의 사람들을 질투나 갈망 없이 관찰할 수 있는 그녀는 과연 무엇을 발견하고 싶은 걸까.
“말로 할 수 없는 미묘함을 작품으로”
어린 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또한 세상을 다 산 것처럼 말하는 작가는 “슬픔이 있어 행복이 있고, 불행을 알기에 행복을 알 수 있다”는 말을 체화하고 있었다.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아름답고 소중히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보다 깨질 듯이 살아가는 시대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에 작가가 깊이 공감한 구절이 있다. “사람들은 살면서 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하고, 다투고 그러지. 서로 다른 시간의 지점에 놓인 전망대에서 저 멀리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한 채 말이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하고 연약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다는 그녀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말로 할 수 있으면 말로 했지!” 그녀가 작업을 설명하며 늘 하는 말이란다. 말로 소통하며 쌓는 오해에서 벗어나 자신이 관찰하며 발견한 이야기를 작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이 인터뷰 내내 느껴졌다.
▲고재인 작가가 김건모의 노래 ‘서울의 달’에서 영감받은 재봉틀 드로잉 ‘서울의 달’. 사진 = 고재인 작가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은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에 관해서라고 했다. 조명 두 개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그 자리에서 뚝딱 드로잉하면서 설명했다. “각자가 빛을 너무 뿜어내는 바람에, 마주보면 눈이 부셔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상황”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그 이미지가 곧바로 전해졌다. 자신에게 도취돼 타인을 보지 못하는 요즘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한다.
또 다른 작업은 ‘돈은 빨아도 돈이다’라는 강렬한 한 문장으로 이미 완결됐다. 실수로 세탁기에 넣고 빤 돈은 그래도 돈이었다며,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를 여성적 시각에서 다루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작업할 때 자신과 가장 가까워진다고 말하는 고재인은 근래 보기 힘든 내강외유형이었다. 자신에게 함몰돼 스스로에 연민하지 않고, 주변을 먼저 둘러보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하는 모습이 새로웠다. 지속적인 작업을 향한 신념과 욕심까지 갖춘 그녀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동하며 자신만의 새로운 좌표를 만들어 내리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