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가수 이애란은 ‘백세인생’에서 “백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고 노래했다. ‘백세청풍: 바람이 일어나다’전의 주인공 김병기 작가는 이 노래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한국 추상미술 1세대이자, 올해로 100세에 접어든 그가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개인전 이후 2016년 또 다른 개인전으로 돌아왔다. 새롭게 작업한 신작들과 미공개작을 포함해, 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작품 세계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 약 5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본격적인 전시 개막을 앞두고 미리 모습을 드러낸 그는 100세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정정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한테 100세까지 정정한 비결 같은 거 묻지 말아요. 난 그런 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그냥 살아온 거지. 나는 그림 이야기가 하고 싶어요. 하루에 그림 몇 시간 그리는지도 묻지 말아요. 그런 물리적인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림 자체가 중요하지.”
▲김병기, ‘자화상’. 캔버스에 오일, 130 x 96.5cm. 2015. 사진 = 가나아트
보통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회환에 젖어, 과거를 떠올리는 시간이 많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과거 이야기보다는 현재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근작 ‘공간 반응’도 작가가 바라보는 오늘의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그렸다. “나는 어떤 작업을 할 때도 현재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그리는 그림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100% 작가로서의 나를 봐줬으면 해요. 미담으로 포장된 거 말고”라고 그는 연신 강조했다.
하지만 작가가 그간 이뤄온 성과들을 이야기하자면 무게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서양의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같은 미술 운동이 일어났던 20세기 초, 급변하는 서양의 새로운 미술 경향을 접할 수 있었던 도쿄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서 그는 김환기, 유영국, 길진섭 등과 함께 수학했다. 이곳에서 서구 전통 미술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에콜 드 파리에서 활동한 후지타 츠구하루를 통해 파리의 전위적 미술을 배우며 추상미술에 눈떴다.
▲김병기, ‘돌아오다 A’. 캔버스에 오일, 162 x 130cm. 2015. 사진 = 가나아트
이후 그는 한국 추상미술의 발생과 전개를 냉철한 시각으로 정리했다. 1950년대 초 피카소의 ‘조선에서의 학살’(1951)이 전쟁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려졌다는 점에서 피카소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글을 낭독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1965년에 미국으로 떠났다가 50년 만에 귀국해 대한민국 국적을 획득했다. 파란만장한 인생 발자취다.
인생의 무거운 무게를 버티게 한 건 예술에의 꿋꿋한 열정이다. 추상미술이라고 하면 어렵고 난해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주변의 사소한 일상이라는 측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깝게 느껴진다. 작가의 화면에는 197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형상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살아오며 맞닥뜨렸던 현실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집 주변의 사소한 정물에서부터 형체 없는 세계의 이슈들까지 그의 붓에 잡혀 다양한 주제와 소재가 됐다.
신작-미공개작 포함 50여 점 공개
“쉴 때라고? 난 오늘도 그려”
몇 해 전부터는 북한산의 모습을 즐겨 그리고 있다. 그는 “북한산 아래 있다 보니 그릴 일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특별할 것 없다. 산보 후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북한산은 작가의 화면에서 무수한 곡선과 직선이 교차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며 새로운 리듬감을 보여준다. 이것은 김병기 작품의 대표적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민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선들은 교차로 역삼각형을 만들거나, 미묘한 형태들을 그리면서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든다. 그리고 이는 현대사회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기호로 쓰인다.
▲김병기, ‘공간반응’. 캔버스에 오일, 145.3 x 97cm. 2015. 사진 = 가나아트
가나아트 측은 “이 같은 리듬감은 가시적인 세계의 모습이면서 민족의 삶과 애환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며 “김병기의 화면에는 매순간 그가 거쳐 온 한 세기의 삶이 있다. 그는 결코 과거에 멈춰 있지 않다. 그는 늘 보고 발을 디딘 곳의 시간과 공간을 그려왔다”고 설명했다. 오랜 시간 고국을 떠났다가 돌아온 작가의 애틋한 감정, 애정 어린 시선이 반영됐기에 나온 결과물이기도 하다. 빠른 붓 자국, 물감의 흔적, 얼룩, 그리고 여백이 만나는 화면은 파괴와 구축의 과정을 끝없이 반복한다.
이 과정은 완전한 추상도, 완전한 형상도 없음을 말해준다. 작가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고, 수없이 많은 촘촘한 관계로 이뤄졌듯,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작가가 평생 동안 추구한 회화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추상과 형상이 공존하는 형태
작가의 최근 작품들은 이런 사고를 반영하듯, 최소화된 채색과 얇은 안료의 층 등 작업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완성된 작품과 그에 이르는 과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추상성을 통과한 뒤에 나온 형상성’으로 정리했다. 완전한 추상도, 완전히 사실적인 표현도 아닌 추상과 형상이 공존하는 형태다. 서로 대립하는 요소들이 끊임없이 부딪치고 중첩된다. 작가 또한 이 회화 세계를 끝없이 탐구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중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는 그이지만, 그 양식의 틀에는 갇히고 싶지 않는 모습이다.
▲김병기, ‘바람이 일어나다’. 캔버스에 오일, 162 x 112.1cm. 2016. 사진 = 가나아트
“나는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지만, 그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부르면 더 이상 도가 아님)에 어느 정도 공감해요. 현재의 미술은 어떤 정형화된 양식에 빠져 있어요. 양식을 만들었지만, 양식을 만들 때의 정신은 없어진 채 그저 틀만 남은 거죠. 이 틀에 갇히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늘 과거의 틀에 갇히지 않고 오늘의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만들어진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죠. 새 길에서 새로운 이야기와 정신을 찾아야 합니다. 건강 비결? 그런 것보다 이런 이야기가 훨씬 중요해요.”
작가는 가나아트센터 뒤쪽에 마련된 아틀리에를 손수 공개했다. “바로 어제까지 그린 그림”이라며 작업 중인 그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남들이 볼 때는 이미 많은 업적을 쌓아 올렸다고, 멈추고 쉴 때가 되지 않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아직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젊은 작가들을 향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개성(personality)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안 되는 시대예요. 독자성(originality)이 있어야 세계를 보고 스스로도 돌아볼 수 있죠. 독자성을 가진, 힘 있는 작업을 할 수 있기를 바라요. 적극적으로 뜨겁게 살고 작업해야죠. 저도요.”
전시는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5월 1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