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작가 - 문성식] 얄궂은 세계, 얄궂은 ‘레알’ 그림
▲‘얄궂은 세계’의 전시 전경. 사진 = 두산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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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윤하나 기자) 비쩍 마르고 힘없는 노인의 맨 몸을 이렇게 여실히 바라본 일이 있던가? 누군가의 적나라한 맨 얼굴, 꾸미지 않은 몸을 오래도록 응시할 기회는 실제 생활엔 많지 않고 TV 또는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다. 이런 영상 속 누군가의 맨얼굴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동시에 관음의 쾌락을 준다. 그런데 문성식의 그림을 보며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대상을 관찰하고 그려내는 것이 회화의 기초라면서, 문성식의 그림을 보며 느끼는 긴장감과 처연함은 왜 이리 낯선 것일까? 그의 얄궂고도 납작한 세계는 인간을 향한 연민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인가?
고요한 숲 속의 잔인한 내부
두산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문성식의 개인전 ‘얄궂은 세계’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밀착된 시선과 세밀한 묘사로 가득하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참여한 최연소 작가로 유명세를 떨친 문성식은 그런 수식어와는 별개로 이미 오래전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적 세계를 구축했다. 경북 김천에서 나고 자란 그는 초창기 자신이 경험한 어릴 적 고향 김천의 풍경과 기억을 연필 드로잉으로 옮겼다. 시골 고향집에서 치러진 할머니 장례식, 형과 함께 한 낚시, 겨울날 산책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작은 새 등 소소한 일상적 경험과 기억들을 세밀하고 빽빽하게, 때로는 거친 선과 간결한 형태로 그려왔다. 그랬던 그가 이번 전시에선 시간의 축을 과거에서 현재로 옮겼다.
▲문성식, ‘숲의 내부’. 캔버스에 아크릴, 158.8 x 407cm. 2015~2016. 사진 = 두산갤러리
▲문성식, ‘사냥’. 종이에 과슈, 30.8 x 57cm. 2016. 사진 = 두산갤러리
▲문성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설치 전경. 종이에 먹, 57 x 76.3cm(each). 2016. 사진 = 두산갤러리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거대한 페인팅 두 점에 시선이 사로잡힌다. 멀리서 보면 울창하고 신비로웠던 숲은, 한 발짝씩 다가갈수록 그 안에 숨겨진 이면을 드러낸다. 목에 걸린 올가미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며 피 흘리는 사슴, 이를 지켜보는 사슴 가족, 죽은 사냥감 옆에서 불을 지피는 무표정한 사냥꾼 무리, 사냥개 세 마리가 멧돼지 한 마리를 사냥하는 모습. 아마도 자살해 나무에 매달린 사람의 두 다리와, 땅을 파고 무언가를 묻으려는 사람들까지. 신비로운 숲의 내부에는 냉정하고 참혹한 현실이 가득하다. 작가가 즐겨본다는 TV 프로그램 ‘6시 내고향’과 ‘그것이 알고 싶다’가 혼재된 세상이 곧 숲의 내부이자 우리가 사는 현실인지 모른다.
‘숲의 내부’는 작가가 처음 시도한 대형 페인팅으로 그 가로 길이가 4m에 이른다. 개인사를 담았던 기억은 이제 그의 표현대로 ‘소진’됐고, 이제 그는 기억에서 벗어나 외부의 대상을 관찰한다. 그림의 주제는 형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작고 세밀했던 연필 드로잉은 이제 대범한 선 드로잉이나 옅게 그린 초상 시리즈, 그리고 대형 페인팅 등의 다양한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문성식, ‘봄, 여름, 가을, 겨울’. 종이에 과슈, 29.3 x 28.2cm. 2015. 사진 = 두산갤러리
작가는 은신하기 좋은 밤 시간, 숲 내부의 복잡하고 참혹한 세상을 살아내는 인간의 벌거벗은 감정을 담아낸다. ‘사람, 눈물, 파리’을 보자.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초상화에는 모두 어딘가에 파리가 앉아 있다. 우는 이 위에 앉은 파리는 슬픔과 절망이란 감정을 기이한 방법으로 증폭시킨다.
작품 ‘노인의 몸’에도 이런 기이함이 있다. 비애에 젖은 사람을 오래 응시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작가는 노인의 알몸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그 몸을 보다 얇고 뾰족하게, 더욱 마른 형태로 강조한다. 자잘한 붓터치는 곧바로 주름을 표현하는 동시에 마르고 약한 몸을 더 구체화시킨다. 집요한 붓질에 박차를 가할수록 작가가 향하는 리얼리티는 실재를 넘어서는 사실성을 드러낸다.
▲문성식, ‘작별’. 종이에 연필, 22.7 x 37cm. 2014. 사진 = 두산갤러리
이렇게 여러 차례 연필 선이나 붓질을 중첩하는 등 집요한 묘사 과정을 통해 이르는 경지를 작가는 “고요한 그림”이라 표현한다. “고요하고 조용한 그림”이란 작가가 느끼는 감각적인 바로미터로, 만족스러운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을 나타낸다. 이 고요한 상태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선을 덧칠하며 보이는 것 이상의 디테일을 고집한다. 때론 사실을 벗어나 변형에까지 이르는 그의 묘사는 이윽고 형태를 변질시키지만 그로 인해 예기치 못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만족스러운 그림을 그리고 나면 ‘작업실에 불이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는 그의 귀여운 애착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집요하게 섬세한 디테일, 사람을 향한 진심
그의 그림들은 대체로 캔버스 모든 면에 부족한 곳 없이 고르게 묘사된다. 그림 속 모든 공간을 디테일하게 표현해 그림 전체가 평평히 보이기까지 한다. 이에 대해 그는 한 인터뷰에서 서양식 원근법을 철저히 배제한 채, “삼삼한” 아시아적 그림을 추구한다고 밝힌 바 있다. ‘숲의 내부’와 ‘밤’의 미술적 구도는 페르시아의 옛 그림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자신만의 고집과 철학으로 사람을 향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는 그의 여정은, 편견이나 관습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발전하고 있다.
▲문성식, ‘사람. 눈물. 파리’. 캔버스에 아크릴. 41 x 32cm. 2015~2016. 사진 = 두산갤러리
다시 한 번 궁금증이 떠올랐다. 과연 우리의 삶은 한 발치 멀리서 바라봐야만 아름다울 수 있다고? 적어도 그의 그림을 통해서는 슬픔과 연민 그리고 잔혹한 진실도 아름다울 수 있다. 작가가 해석하는 리얼리티에 대한 해답도 그렇다. 문성식의 ‘얄궂은 세계’는 작가가 영민하고 진중하게 관찰해 구현해 놓은 ‘리얼을 초월한 레알’의 세계가 아닐까. 전시는 4월 2일까지.
윤하나 기자 heee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