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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공모 당선작가 ③ 권인경] “기억의 중심에 있는 그 장소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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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79호 김금영 기자⁄ 2016.04.18 09:34:04

▲권인경 작가. 사진 = 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에서 정우성은 기억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장소로 자연스럽게 향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 ‘내가 잠들기 전에’ 속 니콜 키드먼은 매일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기억을 잃는 병을 앓는데, 특정 장소에 가자 잊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주인공은 똑같이 말한다. “나 여기 와 본 적 있어!”

사람들은 흔히 추억을 기억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그 추억이 기반하는 근원은 어디인가?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가게, 날씨 좋은 날 걸었던 산책길, 친구와 신나게 놀았던 노래방 등…. 지나온 모든 추억엔 특정 장소가 자리한다. 그리고 그 익숙한 장소를 오랜만에 지나칠 때 추억도 불현듯 함께 떠오르기 마련이다.

권인경 작가에게도 특별한 장소가 있다. 30년 넘게 살았던 신반포 쪽의 낡은 아파트. 결혼 뒤 지금은 다른 곳에서 살지만, 지금도 매일 기억 속에 생생한 곳이다. 작가와 나이가 비슷한 아파트는 그녀의 삶 거의 모두를 지켜봐온 존재이기도 하다.

▲권인경, ‘상상된 기억들 1’. 한지에 수묵 콜라주, 아크릴. 125 x 187cm. 2015.

“지금은 낡아서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는 아파트예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허름한 건물일 뿐이겠지만, 저는 이곳에 갈 때마다 유년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요. 제 작업은 주로 제가 실제 경험하고 생활했던 공간을 바탕으로 이뤄집니다.”

그녀가 화면에 등장시키는 장소들은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하다. 여러 요소가 한데 어우러지기 때문. 멀리서 보면 단순한 산수화 풍경 같지만, 그 내부를 잘 살펴보면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 풍경이 보인다. 아파트 단면을 잘라놓은 듯한 화면도 보이고, 한문으로 가득한 고서(古書)가 눈에 띄기도 한다. 이 공간 모두가 작가의 추억이 들어간 결과물로, 작가는 이 장소들을 그리며 자신의 돌아온 삶을 다시 경험한다.

▲권인경, ‘경계의 바깥’. 한지에 고서 콜라주, 수묵 채색, 96 x 130cm. 2013.

추억을 기억하는 데는 장소뿐 아니라 사람도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사람보다는 장소, 또는 그 장소에 존재하는 사물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이 또한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픈 동생을 돌보기 위해 가족의 관심이 동생에게 많이 쏠리면서, 어린 시절 사람을 통한 경험-관계보다, 장소 또는 사물을 통해 느끼는 감정이 더 컸다고.

▲권인경, ‘증축된 기억 1’. 한지에 고서 콜라주, 수묵, 아크릴, 92.5 x 61cm. 2015.

“어렸을 때 동생이 많이 아팠어요. 어린 나이에 수술을 받다가 많이 놀란 뒤 실어증을 앓았죠. 방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생활하다가, 어쩌다가 잠시 외부와의 소통을 하는 식이었어요. 낯가림이 심한 고양이들이 새로운 공간에 갔을 때 한참이 지난 뒤에야 살짝 한 발을 내딛는 것처럼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동생은 과거 지냈던 장소에 대한 애착이 커요. 그래서 마음이 불안할 때면 예전에 살았던 아파트 주변에 가서 구경하면서 안정을 찾더군요. 그 모습을 지켜보고 공간을 공유해오면서 저도 장소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없어서 삭막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오히려 사람을 넣지 않아 한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작품에는 분명히 도시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런데 같은 장소라도 보는 사람마다 자신만의 추억을 바탕으로 재해석해 장소는 각각 달리 보일 수 있다. 작가는 여기에 어떤 인물을 집어넣어 마치 그 특정 인물만의 공간인양 한계를 정해놓고 싶지 않았던 것.

현대인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장소의 존재

그리고 장소에 대한 관심은 점차 장소와 인간과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관심으로도 확장됐다. 처음엔 단순히 자신의 삶이 존재하는 장소에 관심을 가진 것이 시작이었다. 그런데 장소가 추억뿐 아니라 그 장소에 존재하는 사람의 정체성과도 연관돼 있다고 점점 느꼈다. 주변에 흔한 아파트를 봐도 알 수 있다. 똑같은 구조를 지닌 공간이지만, 어떤 사람이 사느냐에 따라 공간 구성이 확 달라진다. 이에 대한 관심을, 아파트 가운데를 뚝 잘라 단면을 보여주는 ‘공간의 층위들’ 작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권인경, ‘공간의 층위들’. 한지에 고서 콜라주, 수묵 채색, 88 x 60cm. 2011.

그리고 작가는 “추억이 깃든 장소가 사고나 화재로 사라지면 그 공간을 잃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기가 없어진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고 짚었다. 이는 인간이 특정 장소나 자신만의 물건들에 유대감을 느끼고 그것과 일상적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깊이 투영하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작가는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은 등장인물들의 실제 소유 물건들을 통해 등장인물을 소개했다. 그들이 속한 장소에서 그 인간의 정체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에스키모인들은 새 물건이 자신에게 오면 혀로 핥는 의식을 하는데, 이는 물건을 인간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있어서다. ‘우리를 둘러싼 물건들은 결국 우리인 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칙센트 미하이의 인식 또한 이에 맞닿아 있다”고 작업노트를 통해 밝혔다.

▲권인경, ‘하트 - 랜드(Heart - Land)’. 한지에 수묵 콜라주, 아크릴, 127 x 158cm. 2014.

“장소는 인간의 삶과 매우 밀접하게 맞닿아 있어요. 인간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위로를 해주는 존재이기도 하죠. 현재의 삶이 어려운 사람들이 과거 행복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나 물건을 찾아 마음을 치유하려는 시도도 흔하잖아요? 그래서 더 장소를 보여주는 작업에 흥미를 느꼈어요. 또 작업을 통해 저 자신도 힘든 감정을 해소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장소를 보여주는 작업은 철저히 계획적이기보다는 즉흥적인 감정에 의해 주로 진행된다. 큰 틀만 잡아놓은 뒤, 스케치를 한다. 그리고 기억이 불현듯 머릿속에 스쳐지나갈 때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매체를 붙인다. 덧입히는 과정에서 공간 위에 또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최근 몇 년 동안은 대형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박능생, 박영길, 조풍류(조용식) 작가와 함께 서울의 전경을 큰 스케일로 선보이는 작업을 2014년, 2015년 ‘더 서울(The Seoul)’전에서 전시했다. “서울의 많은 장소들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주변 산도 다니고, 서울 이곳저곳을 가보면서 열심히 작업 중이다. 최근에도 계속 스케치를 다니고 있다. 이번엔 10m 크기를 작업해보자고 작가들끼리 이야기는 했지만, 진행이 돼봐야 알 것 같다”는 작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삶과 맞닿은 장소 이야기는 현재진행형

이밖에 새로운 도전도 시작했다. 늘 붓으로 그림을 그려온 그녀가 모니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 수업에 출석해 일러스트, 영상 프로그램을 배우느라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권인경, ‘모호한 공간 2’. 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 90 x 103cm. 2013.

“2차원적 평면에 움직임을 주면 장소가 어떤 느낌으로 변할지 궁금해졌어요. 그렇다고 완전히 전문적인 미디어 작업을 선보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아날로그 방식도 놓지 않았어요. 다만 새로운 분야를 배우고, 이것을 제 기존 작업에 접목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어요. 실제로 선보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열심히 배우는 중입니다.”

지금까지 그녀는 살아오면서 접한 장소들을 통해 정체성을 발견하는 작업을 주로 선보여 왔다. 그런데 요즘엔 과거의 장소뿐 아니라 새로운 장소를 오가느라 바쁘다. 앞으로 발전할 그녀의 작업에 대한 기대감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음에 그녀의 작품을 보게 될 장소는 어디일까? 또 화면엔 어떤 곳들이 등장할까? 작가의 다음 작업이 대답을 해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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