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도시(都市). 사전적 정의는 ‘일정한 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정의가 부족한 것 같다. 보편적으로 도시가 지닌 이미지는 세련되고 화려하다. 동화 ‘서울쥐와 시골쥐’에서 시골쥐는 먹을 것이 풍부하고 화려하게 사는 듯한 서울쥐를 부러워한다. 시골을 떠나 도시로 진입하는 것이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정석이었던 과거부터 현재까지 도시를 향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화려하고 멋있는 이미지로만 도시를 이야기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그 이면엔 여러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도시 불빛 뒤의 어둑한 골목, 사람이 북적했다가 조용해진 거리, 고층 빌딩 옆의 판자촌 등 정반대되는 이야기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 도시다. 도시라는 동일 소재를 두고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 두 전시가 눈에 띈다.
사람들의 흔적만 남은 도시를 기억
김우영 ‘어롱 더 블러바드(Along The Boulevard)’전
영화 ‘섹스 앤 더 시티’ 속 도시는 시끌벅적하다. 비싼 월세에도 불구하고 캐리는 뉴욕 맨해튼의 작은 방에 살기를 고집했다. 문밖 도로에는 늘 택시가 줄 지어 서 있고, 차들 사이를 비집고 뛰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그런데 김우영이 바라본 도시 풍경은 뭔가 다르다. 그의 화면엔 다양한 건물들이 존재한다. 가지각색 독특한 색감을 지닌 건물들은 그 자체로 눈길을 끌지만 더 독특한 점이 있다. 건물 안과 그 건물 앞에 위치한 도로에 사람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것.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관광지나 대도시의 쇼핑몰 등이 아니라, 한 때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던 특정 도시의 모습을 담는다. 사람들은 떠났지만 그 공간과 함께 했던 대자연의 바람과 빛,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흔적에서 도시의 과거 모습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도시는 한적하고 고요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사람들의 흔적을 읽어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컨대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그림을 다시 보면 어두운 색감 속에 마네킹이 보이는 작품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이 건물 뒤엔 사람들이 모여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된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작가는 캘리포니아로 떠난 이후 다양한 대도시를 마주하며 사진을 찍었다. ‘여행’을 작업의 중요한 요소로 삼는 그는 세계 곳곳의 도시를 직접 가보고 현장을 느꼈다.
도시를 주제로 한 전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7년 도시 주제의 첫 전시를 가졌다. 그리고 두 번째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건물을 통해 도시의 앞면을 보여주면서, 뒤에 숨거나 남은 사람들의 흔적 이야기까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후 계속해서 도시 시리즈를 이어갈 계획이다. 그는 “세 번째 전시에서는 프린팅한 용지로 도시 건물을 래핑해 이를 사진기에 담고, 네 번째에는 도시에 직접적으로 사람들까지 등장시킬 생각”이라고 말했다.
꾸준히 도시 관련 이야기를 다뤄오는 데에는 오래 전부터의 관심이 자리한다. 작가는 홍익대학교 도시계획과를 졸업했다. “원래는 의대를 가려고 했는데 점수에 맞추다 보니 가게 됐다”고 고백했지만 실상 도시계획은 공부할수록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특히 여러 건축물을 통해 느끼는 도시의 매력이 컸다. 작가는 “프랑스 개선문을 설계한 건축가 장 프랑수아 테레즈 샬그랭에 대해 공부하며 흥미를 느꼈다. 그런데 한국은 프랑스와 달리 그런 건축물을 설립할 수 있는 도시 계획이 당시 수립돼 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외부의 건축물과 도시에 더 눈길이 가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접한 디트로이트도 도시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작가는 “겉은 폐허 같지만, 곳곳에 아티스트가 자리 잡아 새로운 도시가 재생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이처럼 안쪽에 숨어 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도시 작업 초창기엔 도시 살림과 주변 산업에도 관심이 이어져 산업화된 도시 현장을 찍으러 다니기도 했다. 현재는 도시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나타내기보다 건물의 면, 그리고 도로의 선 등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작업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그래서 사진이지만 추상화 같기도 한 오묘한 특징이 있다. 핑크색으로 도배된 건물, 아주 하얀 건물 앞에 흩날리고 있는 붉은 꽃잎 등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들, 간단한 보정 작업 외에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실제 도시의 모습들이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새벽이나 주로 비오는 날 촬영하는 노력도 기울인다.
촬영한 도시의 풍경에는 그 건물이 위치한 대로(boulevard)나 거리 명을 작품 제목으로 붙인다. 이 이름에 따라 작가가 어느 도시들을 지나가며 그의 흔적을 남겼는지 유추할 수도 있다. 작가는 “앞으로는 자연과 함께하는 도시의 모습, 그리고 인공적인 손길이 들어간 도시의 모습 등도 보여줄 계획”이라며 “중국과 한국 도시를 현재 찍고 있다. 아시아권 도시를 유럽에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김우영은 한때 광고사진 작가로 더 유명했다. 송승헌, 소지섭의 의류 브랜드 ‘스톰’, ‘닉스’ 광고 사진을 비롯, 이영애를 모델로 한 ‘헤라’의 화장품 광고까지 성공시키며 인정받았다. 하지만 순수 예술로서의 작업을 위해 광고 작업을 접고, 1994년 뉴욕의 스쿨 오브 비쥬얼 아트에 입학해 다시 사진을 전공했다. 이번 전시는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을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전시는 박여숙화랑에서 4월 28일~5월 20일.
장난감 조립하듯 내가 만드는 도시 풍경
지훈 스타크 ‘장난감 도시’전
김우영 작가 ‘어롱 더 블러바드(Along The Boulevard)’전의 도시가 고요했다면, ‘장난감 도시’전의 도시는 북적대는 느낌이다. 그런데 신나게 북적댈 뿐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
6.25 전쟁 직후. 사람들이 살던 공간은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폐허가 됐다. 건물은 무너지고,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한 어린 아이는 자신이 바라보는 도시의 모습을 독특하게 묘사했다.
“밤새 땅을 파헤치느라고 나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우리 판자촌 골목 어떤 지점을 파헤쳐도 온갖 무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누나와 어머니의 얼굴을 나는 떠올렸다. 이 장난감 같은 도시의, 저 우스꽝스러운 상자 속에서 그들은 나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가슴이 빠개질 것 같았다” - 이동하 ‘장난감 도시’ 中.
지훈 스타크 작가의 ‘장난감 도시’전은 이동하의 동명 소설을 모티브로 기획됐다. 소설이 보여주는 현실은 잔혹하다. 시골을 떠나 상경한 도시의 판자촌은 새 삶보다는 계속해서 잔인한 현실을 보여주는 장소로 소년을 압박했다. 그 가운데 소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들려주는 도시 이야기는 지훈 스타크의 마음을 끌었다.
지훈 스타크는 “2년 전 한국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이동하의 소설을 읽었다. 굉장히 슬픈 이야기지만 극 중 소년이 공간을 설명하고 풀어가는 방식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며 “같은 공간이라도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도시는 또 다르게 느껴졌다. 순수하고 인간적인 풍경, 그 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주력한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시선으로 바라본 도시의 모습이다. 동화책에서 본 듯한, 또는 어린 시절 스케치북에 그렸던 내 집과 도시 건물들 같은 모습이 화면 위에 재현돼 눈길을 끈다. 오일 크레용과 목탄 등을 사용해 더욱 동화적인 느낌을 살렸다. 하지만 그 내면을 바라보면 바쁘게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이 보인다. 도시의 일상을 통해 현실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담아낸 것.
하지만 여기에 비극적인 의미를 담으려는 건 아니다. 작가는 “마치 장난감을 조립하듯,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억 속 공간을 조립하면서, 화면 속 도시가 각자에게 색다른 의미의 공간으로 다가가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장난감 도시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화면엔 세계 여러 도시가 등장한다. 인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의 아이오와로 넘어가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환경에서도 비롯됐다. 한 예로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에 다녀온 후 그린 ‘바자(Bazaar)’에는 이국적인 그릇을 파는 상점부터 정육점, 원단가게, 생선가게 등 여러 상점들을 어린 아이의 상상 속 도시처럼 묘사했다. 반가운 건축물도 보인다. 남산타워도 그의 화면에 등장한다. 작가는 “각 도시엔 매력 있는 건축물들이 있다. 건축물을 통해 영감을 받기도 한다”며 “한국에서는 덕수궁, 경복궁이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건축을 설계하듯 작업을 하는 특징이 있다. 다층적인 색감과 구조 위에 손 글씨로 적어 놓은 설명들, 입체적인 일상의 공간이 2차원의 결과물에 모두 담긴다. 언뜻 보면 건축 설계도 같은 느낌도 난다. 아이오와주립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이력이 영향을 줬다. 대학 시절 건축 스케치를 접하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직접 건축 설계도를 만들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하우스 푸어(house poor: 집을 보유하고 있지만 무리한 대출 이자 부담으로 빈곤하게 사는 사람들) 지원 사업에서 집 디자인을 공모했는데, 바닥이 파인 평범하지 않은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어 최종 선정됐다. 그 결과 실제 집으로도 만들어졌고 지금도 아이오와에 존재한다.
작가는 “건축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도시에 대한 관심, 그리고 현재의 작업이 이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분석하지 않고 순수하게 바라보는 아이들처럼 작품을 감상하길 바란다. 또 그런 작품을 앞으로도 꾸준히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갤러리SP에서 5월 1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