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200년 전 국민 예술이 2016년 현재에 부활했다. 예술의전당이 서예박물관 재개관 기념 두 번째 전시로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 - 문자도(文字圖)·책거리(冊居里)’를 8월 28일까지 서예박물관 전관에서 연다.
이번 전시에는 조선시대 궁중화, 민화 등 문자도와 책거리 등 58점이 1, 2부로 나눠 공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 국공립·사립 뮤지엄과 화랑, 개인 등 20여 단체-개인이 비장한 걸작이 대규모로 한 자리에서 공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책거리와 문자도 병풍 걸작들을 만날 수 있다. 정조 때 그려진 초창기 ‘책가도’ 병풍(삼성미술관리움 소장, 개인소장)과 ‘책거리’ 병풍(서울미술관 소장, 개인소장)을 필두로 궁중화원 이형록이 그린 ‘책가도’ 병풍(국립박물관 소장)과 ‘백수백복도’(서울역사박물관), ‘자수 책거리’(용인 민속촌 소장), ‘제주도 문자도’(제주대박물관 소장, 개인소장), ‘궁중 문자도’(개인소장) 등 책가도와 책거리, 문자도의 걸작 병풍 20여 점이 최초로 일괄 공개된다.
책거리의 걸작으로 알려진 장한종의 ‘책가도’(경기도박물관 소장), 책만 가득한 ‘책가도’(국립고궁박물관), 호피 속에 책거리가 그려진 ‘호피 장막도’(삼성미술관 리움), 김기창 구장 ‘유교 문자도’, 개인소장 ‘강원도 문자도·책거리’, ‘유교 문자도’(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등이 이렇게 한 자리에서 일괄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문자도는 글자로 그린, 쉽게 표현해 글자 예술이다. 사물의 형상을 본떴다는 한자의 특성과 맞물려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그려진 그림 장르다.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시대에 꽃을 피웠다. 한 예로 조선왕조 500년 통치 이데올로기가 된 유교 이념, 즉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여덟 문자에 옛날이야기의 상징 물상을 결부시킨 ‘유교 문자도’가 있다. 내용과 조형이 결합된, 글씨 예술이자 제3희 조형 언어로 재해석된 작품이다.
책거리(책가도)는 책가 안에 책을 비롯해 도자기, 부채, 문방구, 향로 등을 진열해 놓은 모습을 그린 정물화 풍의 그림이다. 책거리 또한 조선시대 후반에 널리 유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는 어좌 뒤 ‘일월도(日月圖)’ 대신에 ‘책가도’를 설치해 놓고는, “이것은 책이 아니고 그림”이라면서 이른바 '책 정치'를 펼치기도 했다.
현대미술의 역사적 뿌리는 문자도·책거리에
바야흐로 요즘은 ‘책 안 읽는 시대’다. 글자보다 영상-그림이 익숙하고 편하며, 손으로 책장을 넘기기보다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의 글자를 읽는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을 요즘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시대에 이번 전시는 문자도와 책거리를 내놓는다. 고리타분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데…. 의도는 무엇일까?
예술의전당 측은 “예술의 토대를 찾고자 했다”고 밝혔다. 유행이 어떻게 바뀌든, 서(書)는 모든 예술의 토대라는 입장이다. 문자가 없으면 책도 없었고, 책이 없으면 현재의 문화가 있을 수 없다. 현대미술의 뿌리를 문자도와 책거리에서 찾는 이유다.
또 미래를 바라보는 시도도 있다. 서(書)를 전문으로 하는 서예박물관과 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현대화랑이 협업해 서화미술을 살피는 방식이다.
또 엿본 가능성은 세계의 주목이다. 이번 전시 기획에 참여한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해외에서 오래 전부터 우리 책거리 문화에 주목했다. 200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에 책거리가 소개돼 많은 사람이 몰렸다. 현재도 열광적인 반응이다. 올 9월부터 내년 9월까지 미국에서 책거리를 주제로 한 순회 전시를 열 계획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에서 우리 책거리 문화에 주목하는 건 이 문화가 국제적이면서도 한국적인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책 그림 문화가 먼저 시작됐다. 르네상스 시대 때 개인 서재 문화가 있었다. 그들에게 서재는 ‘호기심의 방’과 같았다. 중국에는 큰 장식장 문화가 있었다. 우리는 18세기 정조 때 이 문화를 받아들였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식 호기심의 방’이 탄생했다”고 전했다.
한국식 호기심의 방은 중국과 서구의 방식을 오묘하게 취합한 형태다. 정 교수는 “우리 책거리 속 가구는 중국식 가구다. 그런데 표현 방식은 서양화법을 받아들였다. 그림 속 진열된 물건은 중국 것은 물론 유럽 물건까지 어우러졌다. 정조 때 문호를 개방하고 중국 문물이 물밀듯 들어온 결과”라며 “독특하게 탄생한 우리식 책거리 문화를 들여다보는 창구 역할을 이번 전시의 작품들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외국에서는 책거리와 문자도에 열광하는데 정작 우리는 소홀한 측면이 있다. 이번 전시를 여는 과정 자체도 수월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먼저 우리의 책거리에 자부심을 느끼고 세계에 알려야 한다. 200여 년 간 계속된 책의 문화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도 담았다”고 덧붙였다.
세계가 주목하는 문자도·책거리의 창조적 계승 필요
전시 기획을 함께 맡은 윤범모 가천대 교수도 의견을 함께 했다. 그는 “한국 회화의 주류로는 채색화와 수묵 위주 그림만 이야기돼 왔다. 하지만 이제 궤도 수정이 필요하다. 중국풍 중심의 수묵이 아니라 200년 전 국민 예술로 손꼽힌 책거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회화 양식으로 문자도와 책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처음엔 왕실 중심으로 책가도가 제작됐고, 이후 양반 가문으로 퍼졌으며, 나중에는 민가에서까지 인기를 끌어 대표적인 민화의 한 종류가 됐다. 형식도 다양했다”고 설명했다.
현 시대에서 다시 읽힐 책가도에 대한 해석도 내놓았다. 윤 교수는 “정조는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던 '일월오봉도(一月五奉圖)'를 치우고 책거리로 대체했다. 당시 파당을 지어 벌이는 권력 싸움을 그만하고 학문으로 인격을 쌓고 수양하라는 정조의 묵언적 암시도 들어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현 시대에도 관통되는 이야기”라고 전했다.
이런 책거리와 문자도의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단순 전시뿐 아니라 꾸준한 계승 노력이 있어야 함도 강조했다. 윤 교수는 “요즘을 이미지 시대라고 하는데, 책거리와 문자도를 창조적으로 계승해 좋은 작품이 꾸준히 나와 주목 받기를 바란다. 이런 취지에서 독특한 구도와 색감으로 자신만의 서재를 그리는 홍경택 작가의 작품도 이번 전시에 특별 출품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