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에서 리서치, 즉 조사와 연구 등의 과정은 작품이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의 당위성 혹은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필수가 된 듯하다. 더불어 이런 리서치 과정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은 그에 맞는 논리적 이해가 함께 한다면 감상이 더 용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가들이 진행하는 리서치는 주로 작품의 주제에 연관된 과거의 연구라든지 역사적 사건, 사료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자료 수집 등이 있다. 이렇게 자료에 근거한 작품 세계를 펼칠 때, 작품과 주제를 연결시킬 수 있는 가장 큰 고리 중의 하나는 ‘가치’일 것이다.
연구할 만한 자료와 표현할 만한 주제의 가치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만한 상식적인 가치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런 가치체계에 대한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보이는 것? 듣는 것? 루브르 미술관에서 관광객이 많이 몰려 잘 보기도 힘든 작은 모나리자 그림은 원본이 아니다. 진짜를 본 적이 없음에도 사람들은 모나리자 그림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매일 접하는 뉴스는 어떨까? 사실과 진실만을 중립적으로 전달한다는 가치는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겠지만, 정말 역사적으로 언론이 사실만을 전달했을 때가 있기는 했을까.
작가 최해리의 작업은 ‘역사’라고 지칭할 수 있는 사건이 종결된 세계, 그 중에서도 작업의 주요 제재에 따라 똑 떼어낸 타임라인의 한 단위가 직접 만들어낸 작품 또는 수집품으로 표현된다. 역사의 흔적들이 모여 그의 작업으로 생성된 세계는 혼란스럽고 이상하며,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건드린다.
‘작가가 제시한 것은 허구인가 현실인가?’
리움 전시장 1층에 마련된 그만의 전시공간은 마치 모임장소인 홀이나 라운지처럼 보인다. 딱히 테이블과 의자 세트 같은 것이 마련돼 있지 않아도 그런 느낌이 들었던 이유는 80년대 부잣집 거실에 있었을 것 같은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벽등, 그리고 벽에 느닷없이 설치돼 있는 커튼 같은 장치들 때문일 것이다. 최해리는 “작가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이 공간은 허구의 라운지며, 허구의 제시는 반대로 현실을 더 명확하게 드러나게 한다”고 말했다.
최해리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업들을 편의상 두 가지 형식의 매체로 나눠본다. 그 첫 번째 분류는 그림이다. 작가의 신작 6점은 벽에 걸려있고, 리움의 협조를 얻어 전시하는 조선시대의 회화는 벽 안을 파고 들어가 만들어진 진열장 안에 놓여있다.
작가는 사군자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회화사에 관심을 뒀다. 그는 동양화를 공부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미술 작가로서 매체의 구분 없이 작품 활동을 했다. 하지만, 관성적으로 구분되고 정의 내려지어지는 미술의 장르에 대해 갑갑증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것은 사람들이 동양화를 떠올릴 때, 당연하게 ‘매란국죽’의 ‘사군자(四君子)’이상을 떠올리지 않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답답함과 같은 것이다. 사군자는 유교적 교양활동의 일부로서 남성 중심적 세계관이 반영돼있는데, 동양화에 대한 인식이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해리는 “역사에 남겨진 것은 승리자이자 남성의 역사라 볼 수 있는 신화와 같은 이야기”라며, 남겨진 역사가 당시의 현실을 반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객관적 사실을 반영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진짜라고 믿고 있는 것이 정말 진짜일까?’
그의 전시에서 눈에 띄는 두 번째 분류는 영상 작업이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서 전면에 보이는 영상작업에는 중국 여인 형상의 도자기 인형과 각종 동물 형상들이 등장하고 뒤 벽면에 설치된 영상에는 꽃, 새, 동물 등의 플라스틱 모형이 등장한다.
최해리는 작업을 위해 각종 기물들을 수집했다. 기물들의 특징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며, 현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기물들은 영상 안에서 인간 대신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고대의 유물 옆에 같이 설치되며, 유물의 가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혼돈=일체’를 제시하다
이 전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잠시 작가 최해리와의 인터뷰 분위기를 전하자면, 기자가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잠깐만요. 그래서… 왜?”처럼 맥락을 파악하려는 질문이었다. 시종일관 작품의 의미를 찾아들어가기 위해 질문을 던지던 기자에게 작가는 친절하게 답을 다 해주었지만, 더욱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질문과 대답이 반복된 끝에 마침내 드러난, 놓치고 있던 부분은 자꾸만 작품을 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현재 사회의 인식 속에 갇힌 인간으로서. 작가는 “다큐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힌트를 줬다. 다큐멘터리(사료와 유물이 제시된 것)를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곧이어 실마리가 잡히는 순간이 왔다.
모든 것은 혼재되어 있었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서양화의 소실점을 고려해 작품을 배치하고, 작품의 주인공은 인간의 상징으로서의 동물이 아닌 정말 동물 그 자체이며, 중국 여인 형상의 도자기 인형이 주인공인 영상 작품의 스토리는 독일 그림형제의 동화를 각색한 것이다. 동양화의 형식으로 다차원의 공간을 표현한 듯 머리모양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새의 모습과 거꾸로 걸린 그림 등은 전시장 안의 작품을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작가가 설정해놓은 세상의 진실을 알려 하면 할수록 어려워지는 것이다.
관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혼륜’의 상태
서양과 동양, 시간과 공간이 마구 혼재된 전시장 안에서 작가가 가장 크게 묻고 있는 것은 바로 ‘보고 듣는 현실이 진짜인가‘다. 작가가 마음 놓고 꾸민 허구적인 공간 안에서 통념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한 시간대의 존재 증거인 흔적들이 모여 있을 뿐이다. 최해리는 전시된 고 회화 4점의 작품 중에도 자신이 모사한 ‘가짜’가 있다고 말했다. 작가가 모사한 진짜 작품이라는 것도 역사 속 어느 순간의 승리자가 남긴 것일 터. 그것이 과연 진짜일 수는 있을까.
입구 쪽의 영상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여성의 중국어 음성은 이 질문에 대한 답과 같다. 중국어라 이해 할 수는 없지만, 작가는 이 음성이 중국 원대 주덕륜(朱德润)의 ‘혼륜도(浑沦图)’에 있는 시의 내용이라고 설명해줬다. 찾아보니 시에서 ‘혼륜’이란 모나지 않은 원(圓)이자 둥글지 않고 모난 것이란다. 인간 관념의 분류로 나뉘지 않은 하나의 몸이었던 시초의 상태를 뜻하는 듯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했다면 이런 풍경들이 탄생했을까’라는 상상과 함께, 짧은 지식과 경험에 의한 통념과 별 것 아닌 관념에 휘둘리며 사는 인간에 대한 쉴 새 없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