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영 기자⁄ 2016.07.22 10:28:02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현대인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들 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한 보호 본능으로, 실제 자신의 모습은 감추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동물들도 다르지 않다. 카멜레온은 주위 환경에 맞춰 색을 바꾸고, 개구리도 자신의 색을 바꾸고, 몸을 부풀리는 등 생존을 위한 위장을 한다.
위장(僞裝). 사전적 정의는 본래의 정체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거짓으로 꾸미는 수단을 뜻한다. 그런데 이 위장의 의미가 엠마 핵에게는 조금 다르다. 분명 그녀의 화면에도 모습이 숨겨진 존재가 있다. 처음엔 그저 꽃이 가득한 화면에 앵무새, 독수리, 나비 등 동물과 곤충이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 바라보면 인간도 같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마치 카멜레온 같이 보호색으로 화면의 색과 자신을 일치시킨 모습이다. 그런데 이 인물은 자신을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 아니다. 주위 환경과 하나가 돼 조화를 이루려는 뜻을 담았다. 즉 숨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 국내 첫 개인전 ‘우리 몸이 꽃이라면’을 통해 새로운 위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엠마 핵 작가를 만났다.
엠마 핵은 몸에 색을 칠하는 바디페인팅 분야에서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한 호주 아티스트다. 그녀의 작업은 위장술 아트로 잘 알려졌다. 1999년 이후 호주 전역에 걸쳐 전시되면서 세계 미술애호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한국을 찾았다.
처음부터 작가로서의 행보를 걸은 것은 아니다. 메이크업이나 헤어와 같은 미용 분야를 택했고, 10년 이상 홍보와 패션 편집부에서 일했다. 현재의 감각 있는 화면은 이때의 경험도 고스란히 흡수한 듯하다. 그리고 2001년 세계 바디페인팅 챔피온십에서 우승을 하면서 바이페인팅 아티스트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는 유럽, 캐나다, 두바이, 홍콩을 돌며 티파니, 삼성, 소니, 파스팔리 펄 외 다양한 회사들을 위한 라이브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랬던 그녀가 작가로서 본격적인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게 2005년이다. 기하학적 무늬, 화려하고 동양적인 디자인 작업으로 유명한 호주의 패턴티자이너 플로렌스 브로드허스트의 월페이퍼를 보고 새로운 영감을 받았다고.
“브로드허스트의 디자인은 인테리어뿐 아니라 패션업계에서도 사랑받을 정도로 독특한 매력이 있었어요. 그 디자인을 활용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배경 앞에 모델을 세우고, 모델의 몸에도 그림을 그리는 방식의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작업이 수월하지는 않았어요. 어깨부터 먼저 그리기 시작해서 한 작품을 온전히 그리는 데만 평균 17~20시간이 걸렸으니까요. 그래서 모델 선택도 중요했어요. 그 긴 시간 동안 저와 호흡을 맞춰야 하니까요. 그래서 세 명의 주된 모델들과 일하고 있어요. 가끔은 저도 제가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게 신기해요.”
모델의 몸에 그림 그리고 동물과 호흡 맞추는 과정
이 위장술 아트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를 2013년 맞았다. 벨기에 가수 고티에와 컬래버레이션 작업의 일환으로 제작한 뮤직비디오 ‘썸바디 댓 아이 유스드 투 노우(Somebody That I Used to Know)’가 그레미 어워드를 수상했다. 이 영상은 현재까지 유튜브에서 약 78억 뷰를 달성하며 미국, 영국, 유럽에 본격적으로 엠마 핵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밖에 17명의 모델로 찌그러진 자동차를 형상화 한 바디페인딩 작업 ‘모터 액시던트 커미션(Motor Accident Commision)’ 프로젝트도 관심을 받았고, 2014년엔 21명의 발레 무용수들과 작업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했다.
엠마 핵이 펼치는 건 위장술 아트인데, 그 형태가 획일화된 건 아니다. 초창기엔 배경과 인물을 일치시키는 작업을 펼쳤고,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는 형태의 ‘미러드 위스퍼즈(Mirrored Whispers)’ 컬렉션도 선보였다. 처음엔 동물 없이 인간만 등장했다가 이후 점차 동물과 곤충들을 등장시키기 시작했고, 인간이 배경 앞에 전면적으로 나선 ‘뷰티풀 우먼(Beautiful Women)’까지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동물이 등장하는 작업의 경우, 실제 동물들을 데려와 완성한 작업이다. 엠마 핵은 각 동물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등 동물들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호주의 대표 동물들과 작업했어요. 앵무새, 독수리 등의 새를 데려왔을 때는 비교적 수월했어요. 독수리는 발톱이 날카로워 모델의 손에 장갑을 끼우는 등 조심해야하긴 했지만요. 그런데 캥거루와 함께 작업할 때는 어려웠어요. 그냥 안으면 된다고 했었는데 힘들어서 자세를 계속 바꿔야 했거든요. 그런데 순간의 마법 같이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 포착됐어요. 인위적이 아니라, 모델과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 이래서 더욱 중요한 것 같아요.”
‘뷰티풀 우먼’의 경우 여성에게 주어진 전형적인 이미지를 깨고, 강인한 모습을 보이는 여성들이 동물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엠마 핵은 “과거 여성들은 지금처럼 많은 것을 할 수 없었고, 주어진 콘셉트의 제약도 있었다. 그런데 이 작업의 여성들은 강인하고 자신감 있다. 그런 여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장 최근엔 작업에 렌티큘러를 도입해 움직이는 이미지로 새로운 시도를 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이미지의 모습이 달라지는 이 작업을 위해 12개의 이미지를 사용해 입체감을 더했다. 새로운 작업 방식에 도전하는 걸 좋아하는 태도는 고티에와의 뮤직비디오 작업에서도 발견됐다. 정지하고 있는 물체를 1프레임마다 조금씩 이동해, 카메라로 촬영해 마치 자신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스톱 모션 기술을 이용해 제작했는데, 바디아트계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 알려졌다.
숨고 싶은 게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이야기
“제가 처음 바디 페인팅을 시작했을 때 참고 자료도 없을 정도로 미미한 분야였어요. 선구자가 된다는 것이 매우 어렵고 힘들었죠. 그런데 저는 항상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작업이 힘들었지만 즐겁기도 했습니다.”
이토록 형태와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의 작업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동양적인 정서, 위장에 대한 이야기다. 엠마 핵의 화면에는 동양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은 듯한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한 예로 ‘블루 앤 화이트’ 컬렉션은 청화백자를 소재로 한 푸른색과 흰색의 배색이 인상적이다. 전통적인 도자기 문양이 모델의 몸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외형적인 이미지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실제 동물을 좋아한다고도 하는 엠마 핵은 모델이 화면에 스며드는 동시에 동물도 함께 배치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담았다. 사비나미술관 측은 “서양은 인간 중심적인 자연관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려 한 경향이 있는데, 동양은 자연의 순리대로 살고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다. 이런 정서를 엠마 핵도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월페이퍼 만다라(Wallpaper Mandala)’ ‘네이티브 만다라(Native Mandala)’ 등 주요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은 자연에 동화(同化)된 채 정면을 향해 서 있고, ‘미러드 위스퍼즈’엔 거울을 보고 이야기를 건네는 듯한 여인이 마주한다. 사비나미술관 측은 “이런 이미지는 호주의 청정 자연이 함께하고 어린 시절부터 관심 있던 동양적인 문양 및 정서가 한데 어우러진, 작가의 인생과 동시에 작업관을 엿보게 한다”고 밝혔다.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만다라의 형태 또한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됨의 표상이다.
작가는 가장 좋아하는 ‘유토피아(Utopia)’ 컬렉션을 꼽았다. 제목과 같이 이 화면에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배경 화면인 자연과 함께 등장하는 동물들과 눈을 감고 소통하는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현 시대는 전쟁과 테러, 기아로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기성찰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또한 결국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화면 속 모델들은 제가 하고 싶은 이런 이야기를 대변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를 이번엔 한국 관객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전시 타이틀인 ‘우리 몸이 꽃이라면’은 결국 작가의 바람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함께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전시는 사비나미술관에서 10월 3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