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션’과 ‘인터스텔라’ 등 최근 개봉된 SF 영화들은 모두 실재감 넘치는 우주 영상을 앞세우며 도래할 우주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선사했다. 우리는 이 영화들 속 우주가 실제 우주를 그대로 보여주는 영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을 보는 내내 현실일지 모른다는 환영에 사로잡힌다. 나사(NASA)가 공개하는 우주 이미지나 소리 자료들도 우리가 바라보는 우주를 보다 구체적인 방향으로 인도한다. 우리에게 우주란 어느 순간부터 매일 보는 태양과 달이 아니라 나사가 찍은 사진, 혹은 우주 영화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스펙터클한 무(無)의 세계 또는 지구 이후의 미래를 떠올리게 하는 막연한 환상들이다.
주어진 정보를 그대로 믿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직접 발로 뛰어 현장을 확인해야 발 뻗고 잘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박민하 작가는 명백히 후자의 경우다. 작년까지 일민미술관과 시청각에서의 전시를 통해 우리의 삶을 둘러싼 '환영(illusion)'에 대해 탐구하는 작가로 알려졌다.
그가 이전까지 포착한 환상은 다음과 같다. 할리우드와 인접한 LA에서의 유학 시절은 아마도 이러한 관심사에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눈(snow)을 볼 수 없는 그곳에서 1톤 이상의 가짜 눈이 거리에 뿌려진 현장이나, 이라크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그와 유사한 사막지형을 미군들이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 지어놓은 중동 마을은 마치 신기루처럼 바그다드를 불러냈다. 그가 포착한 현상, 사물, 장소들은 진짜가 아니지만 카메라(영상)에 담기는 순간 진짜가 되는데, 박민하는 바로 이러한 마술적 환영에 대한 이야기들을 매체적으로 풀어왔다.
작가는 이전 작업에 대해 "무언가가 부재하거나 불가능한데 그걸 대체해 놓은 장소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 속에 만들어진 판타지의 장소나 사물들, 현상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판타지가 생성되는 과정, 그리고 작가 자신의 판타지와 마주하기 위해 해당 장소를 필사적으로 찾아 떠난다.
리믹싱 타임스페이스 - 우주의 뒤섞인 시공간 되짚어 소화하기
박민하 작가가 2016 아트스펙트럼에 출품한 ‘Remixing Timespace(시공간 뒤섞기)'은 이전까지 작가의 주된 관심사였던 환상의 작동원리를 파헤치는 방법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절대적인 양의 리서치를 통해 우주에 대한 판타지의 연대기를 되짚는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제공된 환상이 아니라 실제 나사(NASA)의 우주선 발사 기지를 방문하며 느낀 우주에 가기 전 과정의 숨겨진 이야기와, IT 회사들이 우주 개발을 시작하며 우주 법을 개정하는 등의 현실 상황을 병치해 담았다.
박민하 작가는 이번 전시에 2개의 스크린과 사진 작업 ‘투모로랜드(Tomorrowland)’ 설치작업과 ‘리믹싱 타임스페이스(Remixing Timespace)’ 영상을 출품했다.
우선 리믹싱 타임스페이스를 살펴보자. 영상은 고대 문명부터 이어진 달 신화를 시작으로 현대의 화성 우주탐사의 현장을 경험하며 그 사이에서 발견된 내러티브를 담았다.
작가가 2015년 말 미국 플로리다의 나사 기지를 방문해 본 아폴로 1우주선 발사대는 "고대 신전을 닮아 있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온통 늪지대인 나사에서 그는 자연방사된 우주 유인원의 후세를 보기도 했다. 60년대 우주로 보내기 위해 키우던 원숭이와 침팬지들의 개체수가 급증하자 기지 인근의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방사한 것이다. 이 밖에도 짧은 기간 어렵게 방문한 나사 기지에 대해 말로 다할 수 없는 이야기가 함축적으로 영상에 녹아 있다.
직접 해당 장소를 경험하고, 돌아와 공격적인 리서치를 벌이면서 작가는 하나의 동일한 장소(발사대 39A)에서 각기 다른 시대에 달(60년대)과 화성(약 2035년 예정) 탐사선이 발사된 점을 주목했다. 각기 다른 별들을 중심으로 두 개의 다른 시간대가 만들어낸 판타지들이 하나의 공간에 겹쳐지는 것이 흥미로워 작품 제목도 '리믹싱 타임스페이스'라 정했고, 영상 작품도 이러한 구조를 염두에 두고 편집했다. 달의 시대, 즉 신화와 제의의 낭만적 세계로부터 화성 시대, 즉 IT·과학의 신자유주의 시대로의 이행을 작가는 ‘수행적 리서치’를 통해 아카이브한다. 작가 개인이 가진 우주에 대한 판타지를 시작으로, 해당 장소들을 방문함으로써 자신의 리서치를 작동시킨다.
작가는 우주 탐사의 흔적, 자연과 신화의 모티프 그리고 사운드를 통해 방대한 양의 우주 내러티브를 그만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우주 영화가 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우주의 이미지들과 달리, 작가는 우주라는 거대한 시간과 공간의 장소를 고고학자의 자세로 발굴해냈다.
투모로우랜드 - 별의 패러다임
박민하의 전시 공간 초입에는 두 개의 영상과 4점의 사진이 설치돼 있다. 첫 번째 영상에는 스타워즈의 오픈 시퀀스에서 자막이 먼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방식으로 2개의 우주 국제법 조항들이 화면에 떠오른다. 작가의 설명을 간략하게 전하면, 누구도 우주 영토의 주권을 주장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 시대(1963년)의 우주 법과 소행성 채굴 기술을 가진 회사가 생기면서 민간 기업이 행성을 소유할 수 있도록 개정된 2015년의 경제학적 우주 법을 비교했다고 한다.
이 우주 법 개정을 접하면서 작가의 우주 탐사에 대한 관념은 더 큰 질문으로 확장됐다. '별에 의지해 패러다임이 바뀔까?'란 의문은, 별(소행성)을 사유재산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마치 공항에서 비행기의 출발-도착과 게이트를 알리는 모니터처럼 설치된 디스플레이에 두 시대의 패러다임을 대표하는 법 조항을 대표적인 SF영화 '스타워즈'의 모티프로 보여준다.
그동안의 리서치를 통해 탄생한 이번 전시는 보통의 관람객에게 그다지 친절한 편은 아니다. 작가가 리서치한 방대한 양의 자료와 이야기는 기자도 한번의 감상만으로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며 편집된 이미지들의 사이의 문맥을 알게 되고, 이 전시가 거대한 프로젝트의 리서치 과정인 동시에 첫 번째 결과물임을 깨달았다. 작가는, 화성과 풍경은 물론 토양 성분까지 똑같은 사막을 방문하고 싶다며 앞으로의 계획을 조금 언급해 다음 작업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작가의 생생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이번 주 토요일(23일) 리움에서 열리는 박민하 작가의 렉처 퍼포먼스에 참여해보자. 작가는 ‘리믹싱 타임스페이스’를 준비하며 모은 자료들을 협업 작곡가 Ivan Carames Bohigas와의 라이브 퍼포먼스를 통해 더 풀어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