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입체 페인팅으로 사회표현 정도영
"따로 또 같이, 사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요?"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다세대주택’전. 처음 전시에 눈길이 간 건 전시명 때문이었다. 과거 대가족이 아닌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점차 1인 주택을 선호하는 시대다. 그런데 정도영 작가는 다세대주택을 전시명으로 떡하니 내세웠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안국약품이 운영하는 비영리 문화공간 갤러리AG에서 8월 30일까지 열리는 ‘다세대주택’전을 찾았다. 이 전시장에서는 어떤 흐름이 느껴진다. 입구 쪽에는 작은 차에 여러 가족이 한데 구겨 타고 도시로 떠나는 모습을 담은 작품 ‘상경’이 자리한다. 그렇게 올라온 도시에서 이들이 처음 보금자리를 튼 곳은 다세대주택이다. 층층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정겨운 모습이 ‘다세대주택’ 작업에 보인다. 복잡한 도시의 주차대란을 연상케 하는 ‘주차타워’도 눈에 띄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 회전초밥 집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담은 ‘한솥밥’ 작업도 있다.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해 적응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언뜻 유추된다.
정 작가가 이런 그림을 그리는 데는 직접 경험이 있었다. 울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는 서울 상경 9년차다. 처음 울산을 떠날 때의 모습이 작품 ‘상경’과 비슷했다. 작업에 뜻을 품은 친구들과 함께 상경했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이 개봉동이었고, 이후 신월동 그리고 현재 신림동까지 서울 생활을 이어 왔다. 친구들은 하나둘 다시 돌아갔다. 작가만 홀로 남아 9년간 거주지를 옮기며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단 하나 변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모두 다세대주택에 살았다는 것이다.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과도 같은 삶이었다.
“다세대주택은 제게 낯설지 않아요. 어렸을 때 울산에서도 다세대주택에서 살았어요. 주상복합건물은 많지만, 주거 개념으로서의 다세대주택은 점점 현대사회에서 없어지는 추세예요. 그런데 잘 찾아보니 서울에도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다세대주택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 있더라고요. 잔뜩 긴장한 채 서울에 올라왔는데, 친숙한 느낌에 그나마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반가운 느낌이 들더라고요.”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소통까지 힘든 시대다. 점점 늘어나는 사건, 사고는 개인주의 현상을 강화시킨다. 아파트는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다. 주민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눈을 피하기 일쑤다. ‘이웃사촌’은 이제 다른 시대 이야기로 느껴질 정도로 낯설다. 층간소음 문제도 여기서 발생한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피해를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앞서, 배려는 잊은 채 언성을 높인다. 작가가 살아온 다세대주택도 층간소음을 피할 수 없었다.
“신월동에 있던, 작업실이 10세대가 넘는 다세대주택이었는데, 특히 방음이 잘 되지 않았어요. 저는 밤에 주로 작업했는데, 옆집 부부가 싸우는 소리, 위에서 뛰는 소리, 아래 욕실에서 세수하는 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였으니까요. 처음엔 스트레스였어요. 제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잘 어울리지 못했거든요. 타인에 대한 경계가 커서 초창기 작업에는 이 스트레스를 공격적으로 풀어낸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방음 안 되는 다세대주택에서 생활.
스트레스→포기로 바뀐 순간 시작된 변화
그런데 의외로 소통은 ‘포기’에서 시작됐다. 소음에 스트레스를 받던 작가는 ‘들리는걸 뭐 어쩌겠나’라는 식으로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랬더니 점차 그 소음이 대화로 바뀌어 들리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식사 자리에서는 그날 반찬이 무엇이었는지가 들렸고, 고단한 직장생활을 하고 온 직장인의 푸념도 들렸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소리, 친구와 이야기하는 할아버지까지 이야기에는 여러 삶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작가는 나름대로의 상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혀 관심도 없고,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겠거니 했는데 저 벽 너머 사람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원래의 상태가 무플(댓글이 없는 것)이었다면 작가 나름의 댓글을 달기 시작한 셈이다. 가장 무서운 게 무관심이라는데, 작가는 여기서 조금씩 타인과의 관계에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스트레스가 호기심으로 바뀌면서 점차 생활도 즐거워졌어요. 다음날 계단에서 이웃주민들과 마주치면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요. 4층 아저씨는 9시 30분이면 트럭에 시동을 걸고 출근했어요. 2층 할머니는 손주 사랑이 대단했고요. 점차 이웃들과 교류가 오가면서 나중엔 몇 집 아저씨들이 옥상에 모여 ‘작가 선생! 라면 먹어!’라며 부르기도 했어요. 같이 소주 한 잔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죠. 다세대주택 이웃들의 서울 살이는 이랬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작가의 작업이 그저 다세대주택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저변에는 현대인의 삶, 그리고 소통에 주목하는 작가의 의도가 녹아들어가 있다. 현대인은 늘 외롭고 고독하다고들 한다.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 잘 어울리지 못하면 따돌림을 당하고, 직장에서도 라인 타기를 잘못하면 사회생활을 잘못한다고 구박을 받는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살면서도 조직생활 중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할 때 느끼는 상실감은 현대인이 겪는 큰 문제이기도 하다.
작가 또한 이런 상실감을 느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작가는 서울 사람들에게 이방인, 즉 자신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은 자였다. ‘텃세’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타지인에 대한 배타적 시선 속 이질감과 고독감을 작가 또한 여실히 느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삭막한 가운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발견했다. 이게 작업의 출발점이다. ‘한솥밥’ 작품은 그가 한 초밥집에 들어갔을 때 목격한 풍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둥근 테이블에 앉아 돌아가는 회전 기구 위의 초밥을 먹는 사람들은 마치 대가족이 삥 둘러앉아서 함께 밥을 먹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작가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 영감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업 속 사람들은 재미있는 표정들과 행동을 취하고 있다. 어느 한 사람이 덩그러니 떨어져 나와 고립돼 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모두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다.
개인주의 만연하지만 그래도 서로 부대끼는 사회.
‘오늘을 사는 우리네’ 관계를 긍정적으로 고찰
‘토요일 PM 2:00’는 작가가 여의도 벚꽃 축제에 갈 때 본 풍경이다. 벚꽃 축제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부대끼는 장관이 연출됐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지만, 아름다운 벚꽃을 보고 즐기려는 마음은 같았다. 이렇게 혼자인 것 같으면서도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회 구성원은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라고 하지만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도 사회예요. 저는 그런 현대인의 관계를 풀어내는 데 흥미를 느꼈어요. ‘나 혼자만 있구나’ 느낀 세상에서 옆을 둘러보면 사람의 존재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죠. 다세대주택 작업은 그 잊고 있던 관계를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작업이에요. 은연 중 어울리며 살아가던 과거 시절에 대한 그리움도 있고요. 사회 안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네의 모습들을 우울하지 않게, 유쾌하게 그리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습니다.”
작가의 그림을 보면 마치 만화 캐릭터와 같은 사람들이 화면을 채운다.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 그리고 소통에의 어려움이 가벼운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를 무겁게 표현하기보다는 재미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밝게 조명해보려는 작가의 의도다. 색깔도 형형색색 다채롭다. 꼭 동화 속 세상을 보는 것 같다.
이 동화적 느낌을 더욱 배가시켜주는 건 그림이면서 입체이기도 한 ‘입체 페인팅’ 형식이다. 초기엔 평면 회화를 그렸었는데, 보다 그림에 재미의 느낌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시도한 방법이다.
가장 베이스인 캔버스에는 바탕색을 칠한다. 입체감이 더해지는 건 등장인물들이다. 먼저 종이에 스케치를 하고, 플라스틱 재질인 포맥스에 이 스케치 중 일부를 옮겨 또 그린다. 그린 그림을 잘라내고, 각각의 조각에 색을 칠한다. 그리고 어느 등장인물이 더 앞으로 나올지 배치 구도를 짜고, 마지막으로 캔버스에 붙인 뒤 우레탄으로 코팅 작업을 한다. 입체 페인팅 이전에는 도자 페인팅 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이때도 일상의 친숙한 장면들을 포착해 작업했다.
층간소음이 가득했던 작업실부터 시작해 이제 작가가 관심 있게 살펴보고 작업에 옮기는 대상은 결국 오늘을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과 거기에 섞인 자신의 모습이다. 작가가 그리는 화면은 현대인의 자화상이자, 작가의 삶을 담은 일기장과도 같다.
“길거리를 다니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곤 해요. 출근 시간에 늦을까봐 뛰는 직장인, 학원에 가느라 정신없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돌보느라 지친 엄마까지 바쁘고 힘들게 사는구나 느꼈어요. 그리고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면 또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죠. 바쁘고 힘든 생활 속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점점 삭막해지는 게 아쉬워요. 저는 그 관계에 대해 곱씹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고 싶어요.”
서울로 상경해 ‘나 혼자구나’ 하고 느꼈던 작가는 작업을 하면서 관계에 대해 많이 느꼈고, 변화도 겪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의 모습을 그리는 작가의 일기장은 오늘도 빼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