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커버작가 공모 ⑥ 황민규] 버려진 개털로 만든 작품에서 버려진 사람 냄새가…
▲민규, ‘작은 기념비’. 강아지 털, 디지털 프린트, 포멕스, 아크릴, 가변크기. 2013.
봉사활동도 유행을 타는지 한때 유명 연예인들의 유기견 보호소 봉사활동이 한창 보도될 때가 있었다. 더불어 사람들의 유기견에 대한 관심 역시 뜨거웠던 듯하다. 지금은 유기견 관련 보도는 끊임없이 나오되 관심 정도는 예전과 사뭇 다르다.
많은 언론이 다뤘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하자면 한 해 발생하는 유기견의 숫자는 10만 마리 이상이며, 이들은 유기견 보호소에서 15일 이내에 입양자를 찾지 못하면 안락사를 당한다. 그 많은 유기견의 대부분은 잠시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용됐다가 버림받은 생명들이다. 좁은 보호소에서 다시 인간에게 구원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그들에게 인간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과연 인간의 삶이 그들과 다른 것일까? 인간에게 그들을 버리고 또 구원할 자격이 있기는 한가?
▲황민규, ‘남겨진 흔적’. 유기견 털, 각목, 76 x 51 x 162cm. 2016.
개털
이번에 소개하는 작가 황민규의 작업은 개의 털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작가는 유기견 보호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약 3년간 모은 개의 털로 작품을 만들었다. 흔하고 빤한 스토리일 수도 있지만, 이 작업의 출발점은 작가와 함께하던 반려견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부터였다.
꽤 사회 비판적이거나 세상에 대한 정의 혹은 메시지가 뚜렷한 작가의 작업은 영상, 사진, 설치 등의 다양하고 감각적인 방법으로 제시돼 왔다. 그 중에서도 개털로 만든 이 시리즈 작업은 가장 직관적이고 촉각적인 작업 중 하나다. 직접 만지지 않고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재료는 작가가 가장 사랑했던 가족의 흔적인 동시에 버림받은 영혼들의 지난한 삶의 흔적들이다.
▲황민규, ‘단지 종속될 뿐이다’. 유기견 털, 시멘트, 19 x 9 x 35cm. 2016.
봉사활동
황민규는 20년간 기른 반려견을 잃었을 때, 상실감에 어떤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반려견이 세상을 떠나기 전 털을 다듬어주며 소량을 남겨 놨다. 그리고 그것을 뭉쳐 동그랗게 만들어 조그만 기념비를 만들었다. 그것은 자신을 오랫동안 지켜줬던 반려견의 넋을 위로하는 행위이기도 했지만, 그런 행위는 또한 자신을 치유하는 자구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유기견 봉사활동을 시작했던 것도 그런 행동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유기견 봉사활동이 좋아하는 개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이 절대 아니라고 했다. 우선 그들에게서 나는 역한 냄새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고, 상처받고 겁먹은 개들은 더욱 공격적이기 마련이다. 물리는 것뿐 아니라, 우리 안에 가득 들어차 울부짖는 개들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절망적인 광경이다.
▲황민규, ‘단지 종속될 뿐이다’. 유기견 털, 시멘트, 19 x 45 x 5cm. 2016.
감정 없이 제시되는 절망적인 삶의 흔적
그는 그러모은 개들의 털을 우리 안에 가득 채워 넣었다. 깔끔하고 예쁘게 짜인 우리 안에 빈틈없이 꽉 찬 개털은 마치 살아있는 개 여러 마리가 그 안으로부터 움직거릴 것 같다. “개의 사체를 가둔 줄 알았다”는 감상자의 말은 그것이 개털이든 호랑이털이든 돼지털이든 대상이 어떤 환경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어떻게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지 보여준다.
황민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을 배제하고, 현실만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대중매체에서 다뤄지는 유기견 관련 콘텐츠들은 절대 건조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얼마나 유기견들이 불쌍한지, 반려견을 제발 버리지 말아달라는 메시지를 감정적으로 전달하며 강한 인상을 남기려 노력한다. 반면 황민규는 작업이 진행될수록 더욱 개라는 생명과 거리두기를 한다. 아마 같은 장소에서 숨을 거뒀을 수많은 개의 몸에서 떨어진 털들은 어느 몸에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서로 뒤섞여 한 장의 벽돌이나 예쁜 무늬의 카펫처럼 만들어지고, 그것들은 마치 감정을 반영하지 않는 미니멀리즘 계열의 도널드 저드(Donald Judd)의 조각이나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줄무늬 회화’처럼 보인다.
▲황민규, ‘반복될 줄무늬’. 패널에 유기견 털, 가변크기. 2016.
‘우리 안에 있는 것은 개일 뿐인가’
그저 재료로 이용된 시간의 흔적들은 의식 없이 비춰지거나 장식적으로만 보임으로써 그 잔인성을 더한다. 작가는 예쁘게 정렬된 무늬로 만들어진 작품을 보고 “이 카펫 예쁘다”고 말한 관람객의 말에 영감을 받아 정말 바닥에 깔아볼까도 생각했다.
너무 잔인하다는 기자의 반응에 그는 “그것이 현실”이라며, “예쁜 겉모습에 가려 그 뒤의 진짜 삶을 보지 못하는 것, 숨길 수 없는 역한 냄새, 인간의 생활 시스템에 살다가 어떤 이유로 잠시 벗어낫다 하더라도 다시 인간이 만든 우리 안에 갇혀 생을 마감하거나 인간에게 선택 받아야 하는 것, 그것이 숨겨진 진짜 모습”이라고 말한다.
‘생명 경시 풍조’라고 불리는 현상은 단어로 정의되고 일상화되며, 무감각해져 버렸다. 황민규는 그런 무감각을 지적한다. 작업을 바라볼 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달갑지 않다. 어차피 그때만 불쌍하다며 눈물 한 방울 내비치고 끝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과 동물의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차피 시스템 안에서 살다가 (게다가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갇혀 있지 않은가)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과 인간의 생명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생명의 가치에 급을 매기고 아니고의 주제는 아닐 것이다. 결국 황민규의 생명에 대한 관조적 시선의 작업은 타 개체의 생명의 가치 뿐 아니라 스스로의 삶 또한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개일 뿐인가’
김연수 breezeme@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