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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사의 공공사사(公共私事)] 너의 이웃이 불행하면, 너도 불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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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10호 문래당 김집사⁄ 2016.11.18 17:00:06






(CNB저널 = 김집사 인문예술공유지 문래당文來堂 운영자, 생존인문 팟캐스트 〈너도 고양이로소이다〉 진행자)


케인스의 항산과 항심, 맹자의 빵과 장미

1인당 국민소득은 1960년의 100달러 이하에서 2016년의 근 3만 달러로 55년 만에 거의 300배 늘어났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에 쓴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논문에서, 매년 단 2%로씩만 경제가 성장해도 100년 뒤에는 인류가 주당 15시간만 일해도 생존에 필요한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으니, 나머지 시간은 문화와 예술과 철학을 즐기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맹자는 제나라 선왕에게 “항산(恒産)이 없어도 항심(恒心)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백성의 경우에는 항산이 없으면 항심을 지닐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이를 현대적으로 번역하면, 항산은 일정한 물적 토대이자 사회경제적 안정이며 항심은 일정한 정신적 여유이자 문화와 예술과 철학을 향유할 수 있는 마음 상태일 것이다. 케인스 식으로 말하자면, 항산은 생존에 필요한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이고 항심은 문화와 예술과 철학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여유이다. 항산이 현대의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생존하는데 필수적인 ‘빵’의 문제라면, 항심은 인문예술적 영역에서 삶의 존엄을 누리기 위한 ‘장미’의 문제인 것이다. 


평화와 정의에서의 ‘먹고사니즘

실제 지난 100년간의 경제성장률은 2%를 훨씬 더 상회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케인스의 전망처럼 주당 15시간 정도만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문화와 예술과 철학을 즐기며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이는 일차적으로 자본이라는 시스템이 초래할 수밖에 없는 자산 양극화와 소득 불균형 때문이며, 이차적으로는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을 일정하게 견제하면서 완화시켜 주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1차 세계대전 직후 패전국 독일에 대한 연합국 측의 가혹한 배상 요구를 반대하면서 “너의 이웃이 불행하면, 너도 불행해진다”라는 예언을 하였고 이는 20년 후 발발한 2차 세계대전으로 징험되었다. 모두가 불행해진 것이다.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연구하는 사회역학 분야의 전문가 리처드 윌킨슨은 “평등이 답이다 - 왜 평등한 사회는 늘 바람직한가?”라는 책에서 전 세계의 수많은 공식적 통계자료들을 분석하여 구조적 불평등이 통념과 달리 빈자들은 물론이고 부자들의 건강과 정신까지 해친다는 것을 밝혀냈다. “빈자가 불행하면, 부자도 불행해지는 것이다.”


평화(平和)는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공평(公平)하게 쌀(禾)을 입(口)에 분배했을 때 비로소 도래하며, 정의(正義)는 윤리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정(公正)하게 양(羊)을 톱니 모양의 날(我)로 잘라 분배했을 때 비로소 달성된다. 전쟁과 평화, 정의와 윤리의 문제는 결국 먹고 사는 문제(먹고사니즘)에서 초래되는 것이다. 독식할 것인가? 나눠 먹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사진=위키미디아)


자유와 평등, 우애의 삼위일체

자유와 평등은 보통 대립된 것처럼 느껴진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처럼, 자유는 불평등을 초래하고 평등은 부자유를 초래한다는 사고이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에게 자유는 단지 시민에게 있어서 정치적 참정권의 확보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자유는 가난한 노동자가 자신들의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평등 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한편 칸트에게 있어 평등은 도덕적 자율성(moral autonomy)이 내면화된 ‘자유로운 시민’과 다른 ‘자유로운 시민’ 간의 수평적 관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자유에는 평등이 전제되어야 하고, 평등에는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고립을 요구하되 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였고 에도 시대 유학자 이토 진사이는 “도(道)는 길(路)과 같다. 사람들이 왕래하는 까닭이다”라 하였으며,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된다”라 하였다. 여기서 고립을 요구한다는 것은 정신적ㆍ실존적으로 자유로운 시민이 되고자 함이며, 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뜻(志)을 함께하는(同) 동지(同志)와 길(道)을 함께 걷는 반려자(伴)로서의 도반(道伴)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유로운 개인과 자유로운 개인이 사회를 이루는 데에 있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계약의 비계약적 토대”로서의 ‘신뢰’ 내지 ‘연대’를 말한다. 우애(友愛)이다. 자유와 평등, 우애는 근대 시민사회의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이다.


▲막시밀리안 드 로베스피에르. (사진=위키미디아)


자유와 불안, 소속과 구속의 변증법

자유는 불안을 초래하고 불안하면 소속되고자 하며 소속되면 구속된다고 느껴 다시금 자유롭고자 한다.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불안은 싫고 우리는 소속을 원하지만 구속은 싫어한다. 불안은 보통 사회경제적 불안정에서 초래되고, 구속은 보통 위계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성에서 초래된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자유는 고용과 해고가 유연하고 자유로운 노동시장에서의 사회경제적 자유(불안)이며, 우리가 원하지 않는 소속감은 전체주의적 동일성을 강제하는 정신적ㆍ실존적 소속(구속)이다. 모든 것이 화폐와 상품으로 등가 교환되는 시장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일사불란하기를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공동체에서, 개인은 언제든 대체되고 교환될 수 있는 부속품이거나 언제든 대(大)를 위해 희생시킬 수 있는 소(小)이다. 장기짝의 희생은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인 것이다.


부자유 vs 자유 - 유연 : 불안 또는 고립-단독 vs 안정성(평등, 소속, 연대)

불평등 vs 평등 - 경직 : 구속 또는 소속-연대 vs 유동성(자유, 고립, 단독) 


반면 우리가 원하는 자유는 각각의 개인이 내적으로 단독적이고 고유한 정신적ㆍ실존적 자유이며, 우리가 원하는 소속은 구성원 간의 신뢰와 연대를 기반으로 한 상호부조적ㆍ호혜적 관계망 안에서의 소속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는 개인들이 서로와 대등하게 만나 서로를 보듬어 껴안기에 넉넉하지는 않지만 정신으로는 풍요로운 커뮤니티가 만들어진다. 이 안에서 자유는 더 이상 불안이 아니고 이 안에서 소속은 더 이상 구속이 아니다. 각각의 개인은 그 자체가 ‘우주’이고 ‘전부’이다. 어느 하나라도 사라지는 순간 하나의 우주가 소멸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어느 하나도 대체될 수 없으며 교환될 수 없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남들과 똑같지 않고 소인은 남들과 똑같으면서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하였다. 군자는 자유로운 단독자(單獨者 대체불가능한 개별자)이기에 오히려 연대가 가능하지만, 소인은 부자유한 동일자(同一者 대체가능한 일반자)이기에 오히려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상호부조: 다수의 개인 또는 집단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행동하면서 성립되는 사회적 관계. 
호혜적: 서로 특별한 혜택을 주고받는. 또는 그런 것.

코스모폴리탄 또는 세계시민의 연대

맹자는 “모든 사람이 요임금과 순임금이 될 수 있다” 하였고 예기(禮記)에서는 “천하는 모두의 것(天下爲公)”이라 하였다. 전자는 출신에 상관없이 누구든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윤리적ㆍ내면적 자율성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며, 후자는 이 세계가 누구에 의해서도 사적으로 전유될 수 없는, 따라서 모두에게 평등하게 공유되어야 하는 보편적 공통체(共通體 Commonwealth)라는 뜻이다. 자율적인 시민과 평등한 사회구성체. 자유는 정신과 실존의 영역에서 요구되며, 평등은 사회와 경제의 영역에서 요구된다.


공자는 “사해(四海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다 형제이니 군자가 어찌 형제가 없음을 근심하겠는가?”라 하였다. 송나라의 학자 장재는 “백성과 나는 동포(同胞)이다”라 하였다. 명나라의 학자 왕양명은 “천하가 하나의 집”과 같다고 하였다. 이 모두가 세계시민(cosmopolitan)으로서의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이다. 원래 자궁을 함께한 피붙이라는 뜻이었던 ‘동포’는 더 이상 피로 연결된 혈족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 매기(힐러리 스웽크)는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모쿠슈라(Mo Chuisle 나의 혈육)’였다. 동포가 너의 이웃이다. 너의 이웃과 함께 해야 너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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