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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전시 - 정석희 '시간의 깊이'전] 지혜로 읽는 타인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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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10호 김연수⁄ 2016.11.18 14:47:26

▲정석희, '늪'. 78개의 이미지, 영상, 8분 18초, 가변크기. 2016.


한 줄의 글을 썼을 때, 하다못해 말 한 마디를 뱉었을 때에도 ‘그런 시간과 상황이 아니었으면 내가 그 말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는가? 말과 글, 행동 등 인간이 생산하는 모든 것들은 당시에 내가 존재했다는 흔적이 된다. 행위가 물질로 나타나는 예술 활동은 그래서 더욱 흥미로워질 수 있다. 그런 예술 활동 중에서도 드로잉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들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기록 작업이다.

▲정석희, '명멸하는'. 241개 이미지, 영상, 3분, 가변크기. 2016.


드로잉: 흐르는 시간을 담기에 가장 효과적인 그릇


정석희는 이런 드로잉 작업의 매력을 십분 활용한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드로잉은 흔히 화가들에게 아이디어 스케치나 에스키스의 단계로서 머물지 않는다. 그야말로 시간을 따라 흐르는 생각이나 관념을 연이어 잡아내 화폭에 옮긴 여러 장의 드로잉은 한 권의 책이나 애니메이션 영상 그리고 그대로 완성도 있는 회화 작업이 된다. 작가는 “선은 공간이나 형태의 특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조형 요소”라며, “드로잉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장르”라고 설명한다. 다만, 작업 자체에서의 묵직한 힘과 완성도가 필요할 때 회화로서 완성한다는 것.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 과정은 화가가 아이디어 스케치를 시작할 때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인 관념으로부터 시작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의식의 흐름을 잡아내며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 역시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한 번 시작하면 끊임없이 흐르는 생각은 막연한 시작의 순간처럼 어느 순간 끝내야 한다고 느낄 때 작업과 동시에 멈추게 된다.


▲정석희, '구럼비'. 152개 이미지, 영상, 2014, 영상, 2분 10초, 가변크기. 2014.


"자연은 사건 현장"


현재 0CI미술관에 펼쳐진 정석희의 전시 공간은 이렇게 남겨진 그의 약 20년간의 흔적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크고 작은 모니터와 빔 프로젝트에서 애니메이션 영상이 상영되고, 드로잉과 회화 작품들이 선보인다. 숲과 강, 바다 등의 자연 배경과 집안의 모습, 표정이 드러나지 않은 인간의 기본 형상이 주로 표현된 작품들은, 힘의 강약이 가감 없이 드러난 터치와, 흑백이거나 강렬하지 않은 색감으로 표출됐다.


영상과 함께 빗소리, 바람소리, 기차소리 등 일상의 소리들이 전시장 안을 편안하게 채우는 가운데 작품 앞에 다가서 감상에 몰입하기 시작하면 멀리서 봤을 때 느꼈던 편안함은 어느 순간 사라진다. 서사가 있지 않은 장면의 흐름은 온전히 작가의 감정과 생각의 변화를 변화무쌍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거친 폭풍우나 번개와 같은 자연 현상이기도 하고, 움직이는 군중의 무리도 되며, 마치 논리적 서사로 전개되지 않는 타인의 꿈속을 전달하는 듯하다.


작가는 자연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인간이 손이 타지 않은 원시적 상태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정지되어 있지 않고 시시각각 사건들이 일어나는 현장의 의미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숲을 예를 들며, “‘신곡’에서 단테가 숲 속에서 만난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연인 베아트리체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위한(예를 들면, 자아를 찾기 위한) 배경이자 현장”이라고 말한다.


“숲에는 막연하게 갈 때가 종종 있는데, 계절마다 느낌이 많이 다르다. 초겨울의 숲은 나뭇가지마다 그 색을 달리하고, 웅덩이에 비친 그림자의 색이 더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의 체험에 따라 그 의미와 색은 다르게 보인다.” 작가가 표현한 작품은 곧 자기가 보는 세상이라는 것. 그는 사회적 주제가 담긴 주제도 자신의 얘기로 귀결되곤 한다고 밝히며, 개인의 이야기 역시 정말 특수한 이야기가 아닌 이상 보편적인 이야기와 감정이 될 수 있다고 전한다.


▲정석희, '끝나지 않은 이야기'. 캔버스에 혼합 매체, 140 x 200 cm. 2014. 부분 이미지(사진=김연수)


무의식이 통하는 직관으로 공감하기


정석희의 작업엔 두 가지의 상반된 느낌이 공존한다. 인간의 모습은 정적이며 쓸쓸해 보이고,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인간 주변의 환경은 어두운 느낌이 있는 반면, 막상 표현된 환경의 구도는 인간을 따뜻하고 아늑하게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그것은 나의 인간관인 것 같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고독한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세계는 정지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은 그 안에 혼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유롭고 싶다고 몸부림쳐도 그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아늑해 보이는 구도를 지적하는 기자의 질문에, “그저 황량한 자연의 모습이 아닌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아마도 따뜻함을 원하는 무의식의 표현이 나온 것 같다”고 답변했다.


작가는 “그림이 연이어 이어진 하나의 영상작업이 작품 하나가 아니라, 영상작업을 이루는 한 컷이 작품 하나”라고 밝힌다. 그도 그럴 것이 각각의 장면이 전달하는 느낌은 구체적인 형상과 추상적인 형상을 번갈아가며 분열되는 의식마저 전달한다. 다시 말해, 각각의 장면마다 다른 감정을 공감할 수 있다는 것. 작가는 조금 더 다른 말로 직관이라고 표현한다.


▲정석희, '소파'. 영상 드로잉, 18개의 드로잉 이미지, 4분 18초, 부분 스틸 이미지. 2002.


이 전시의 제목은 ‘시간의 깊이’다. 시간은 깊이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 되며, 직관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쌓인 직관은 곧 지혜와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작업방식, 작업을 하는 시간, 그리고 결과물은 그 자체로 깊이가 생긴 시간의 물리적 흔적이다. 전시는 12월 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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